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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풍수|서울 동대문 회기동과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 묻힌 ‘회묘’서 지명 유래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폐비 윤씨 묻힌 ‘회묘’서 지명 유래

폐비 윤씨 묻힌 ‘회묘’서 지명 유래

연산군 생모 윤씨의 옛 무덤 터인 경희여중고.

경희대가 자리한 서울 동대문 회기동이란 지명과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깊은 인연이 있다. 사연은 성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481년 과거에 합격해 대구부사 등을 거쳐 정삼품에 오른 유학자 관리로, 오히려 풍수 분야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한 최호원이 어느 날 성종에게 불려간다. 성종은 “주변 사람들이 풍수가 망령된 술수라며 비난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묻는다. 이에 최호원이 “풍수설이 망령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그들의 부모를 장사 지낼 때는 풍수를 본다”라고 답하며 풍수를 적극 옹호한다. 성종은 최호원을 풍수전문가로서 매우 신뢰했는데, 성종뿐만 아니라 이전 임금들도 각자 신뢰하는 풍수전문가를 한두 사람씩 두었다. 태조는 무학에게, 태종은 하륜에게, 세종은 이양달 등에게 의지했다. 최호원의 풍수 실력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보더라도 당대 최고였다. 그러나 최호원을 신하로 둔 성종은 풍수와 관련, 그렇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비록 역사에 의한 평가이긴 하지만, 성종의 가장 큰 불행은 ‘폐비 윤씨’ 사건과 그로 인한 아들 연산군의 폐륜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풍수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1488년(성종 19년) 당상관 김석산이 올린 한 장의 상소가 조정을 발칵 뒤집는다.

“신이 삼가 풍수서 가운데 당나라 일행 선사가 쓴 ‘38장법’을 살펴보니, 폐비 묘가 건좌손향으로 오(午)방이 수파이며, 오방과 미(未)방의 사이가 정(丁)방으로 장남이 되는데, 정방 땅의 반(半)이 오방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장생(長生)방이 오방 땅을 범하지 않았는가 의심되므로 감히 이를 아룁니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닌 일 같으나 김석산이 언급한 폐비 묘는 바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였다. 윤씨는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많았는데, 1479년에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면서 폐비가 되고 3년 뒤 사약을 받고 죽는다. 사약을 내린 뒤 성종은 묘비도 세워주지 않으려 했으나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과 함께 성종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대한 논의를 금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런데 김석산이 어명을 어기고 상소를 올렸으니 성종은 노발대발했고, 대신들은 벌벌 떨면서 성종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석산을 의금부에 넘긴 성종은 한편으론 폐비 윤씨 묘가 ‘흉지’라는 말에 불안해한다. 윤씨 때문이 아니라 윤씨가 낳은 세자(훗날 연산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였다.

폐비 윤씨 묻힌 ‘회묘’서 지명 유래

한때 윤씨를 위한 원찰(願刹)이었던 연화사로 훗날 경종의 원찰이 되기도 했다(경희여중고 아래에 있다).

최호원, 서거정 등 당시 풍수에 조예가 있는 대신들을 부른 성종은 폐비 묘를 다시 한번 살피게 한다. 이에 대해 최호원이 “비록 김석산의 이론이 근거가 없긴 하나, 실제로 폐비 윤씨 무덤 터가 보통 사람이 쓴다면 몰라도 나라에서 쓰기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라는 보고를 올린다. 보고를 받은 성종은 이장을 지시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본격적으로 이장을 논의하자, 무슨 까닭에서인지 성종이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윤씨 묘 이장은 진행되지 않는다.

훗날 김석산과 최호원이 예언한 대로 끔찍한 사건이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성종이 죽은 뒤다.

문제가 된 폐비 윤씨의 무덤 터는 지금의 경희의료원과 경희여중고 일대다. 그러면 회기동이란 지명과 폐비 윤씨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폐비 윤씨가 묻히고 난 뒤 이 일대는 ‘회묘(懷墓)’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릉으로 승격,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다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다시 ‘회묘’로 돌아온다. 그렇게 몇 백 년이 흐른 20세기 초 ‘회묘’란 지명이 좋지 않다고 하여 회묘 대신 회기(回基)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67년 윤씨 무덤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지면서 회기동과 폐비 윤씨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난다.



주간동아 2005.04.05 479호 (p94~94)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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