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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디지털 저예산 영화 ‘깃’ 송일곤 감독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바람이 분다. 태풍 직전의 강풍이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들은 허공으로 날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빨랫줄을 붙잡는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회색빛으로 모호해진다. 바닷물이 점점 몸집을키우고 검은 돌로 쌓여진 방파제는 세찬 파도의 채찍을 맞는다. 그 앞에서 붉은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혼자서 탱고를 추기 시작한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깃’은 자연과 하나 된 인물들의 내면이 아름답게 묘사된 뛰어난 영화다.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의 작가로 선정된 한국의 송일곤 감독, 2004년 세계영화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인 ‘열대병’의 아핏차풍 위라세타쿤 감독(태국), ‘철남’ ‘쌍생아’에서 독특한 감성을 보여준 쓰가모토 신야 감독(일본)이 함께 나란히 포즈를 취했을 때, 송 감독은 다른 두 감독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김기덕 감독처럼 그도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닌다. 니컬러스 케이지를 닮은 유하 감독처럼, 그도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감독이다. 모자를 벗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박경희 감독의 ‘미소’를 보면 된다. 그는 추상미의 애인 역으로 출연했다. 송 감독은 이제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데뷔작 ‘꽃섬’에 이어 ‘거미숲’, 그리고 ‘깃’. 그중 ‘꽃섬’과 ‘깃’이 디지털 저예산 영화다. 어느 것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주류 시스템 안에서 씨름했던 ‘거미숲’도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충무로 차세대 기대주 영순위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송 감독은 서울예전 영화과를 졸업하고 1995년 폴란드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갔다. 안제이 멜리니, 보이첵 카슬러가 강사로 나오는 학교다. 키에슬로프스키도 3학년 강의를 맡았는데 곧 세상을 떠났다. 송 감독이 폴란드에서 만든 ‘간과 감자’는 토룬 국제영화제 단편영화상과 시에나 단편영화제 심사위원상, 서울단편영화제 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비디오로 출시된 단편영화 묶음에서 ‘간과 감자’를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우선 촬영이나 조명 등 기술적인 면에서 뛰어났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적 측면에서 시적 상징과 비유가 돋보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만든 단편 ‘소풍’으로 칸영화제 단편부문 대상을 받는다.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작가로 선정

외환위기 직후, 고난스런 한 가족의 비극적 소풍을 그린 이 영화는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송 감독은 장편 ‘꽃섬’으로 데뷔하기 이전부터 이미 준비된 감독이었다. 나는 그의 ‘꽃섬’을 보고, 누구를 흉내 내서 말하자면, 나의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았다. 나는 한국 영화가 ‘꽃섬’의 아름다운 떨림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미숲’은 실망스러웠다. 그는 주류 시스템에 들어와서 상업적 흥행 성공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가 다시 불현듯 나타났다. 나는 그가 이렇게 빨리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깃’은 매혹적인 작품이다. 영화감독인 주인공 현성(장현성 분)이 옛 애인과 10년 뒤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며 제주도 동쪽의 작은 섬 우도로 가서 겪는 이야기다. 현성이 머무는 우도의 모텔은 21세의 소연(이소연 분)이라는 여자가 운영하고 있다. 일상을 초월하는 팬터지는 ‘깃’에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내가 특히 매혹된 부분은 옥상에서 소연이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그녀의 파트너는 여자였다. 탱고가 매우 섹슈얼한 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그리고 반드시 남녀가 한 쌍을 이뤄 추는 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설정은 매우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상식의 틀을 깨는 게 팬터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장면에 몇 가지 정보를 삽입했다. 소연의 엄마가 돌아가셨고, 그녀는 모성이 결핍돼 있으며, 여자 파트너를 통해서 자기의 미래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소연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나는 여자 파트너를 만들었다.”

‘깃’에서 화려한 발동작으로 삶의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한 이소연은 ‘스캔들’에서 고혹적인 자태로 남성들을 유혹하던 소옥 역으로 시선을 모았던 배우다. 원래 송 감독은 여러 명의 배우와 오디션을 하려고 했지만 첫 차례인 그녀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이후 일정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자연과 하나 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영화 ‘깃’. 제주도 한 모텔 옥상의 풍경이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소연은 ‘깃’을 찍기 전에는 탱고를 전혀 추지 못했다. 무용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9일 동안 탱고를 연습하고 거의 완벽한 동작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탱고 선생은 배수경씨다. 옥상 장면에서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해 붉은 옷의 소연과 함께 춤을 추던 바로 그 여자다. 장진, 이영재, 송일곤 감독 등 3명의 감독이 환경재단에서 각각 7000만원의 예산을 받아 30분 분량의 단편을 만들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환경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송 감독은 80분 분량의 장편을 만들어버렸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 모텔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여기에 소녀가 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옥상 자체가 무대처럼 보였다. 주인공인 영화감독 앞으로 피아노가 오면 어떨까. 10년 전의 여자친구 대신 주인공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존재가 필요했다. 그게 소연이다. 원래 시나리오는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조감독 출신이 택배를 하는 친구를 따라 서울에서 피아노를 싣고 우도까지 가는 이야기다. 피아노를 보내는 여자와 받는 여자가 있다. 그 시나리오를 들고 헌팅했는데 우도에서 모텔을 발견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스태프들에게 이야기했다. 모두 반대했다. 시나리오 좋은데 왜 바꾸느냐고. 제주도에서 하루 동안 지금의 시나리오를 쓰고 서울 올라가서 보여주었더니 다 싫다고, 옛날 시나리오가 더 좋다고 했다. 스태프들을 설득했다.”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자연과 하나 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영화 ‘깃’. 제주도 한 모텔 옥상의 풍경이 영감을 주었다.

30분 분량 찍으려다 80분 분량 장편 으로

‘깃’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감독 현성에게서 송 감독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소연은 현실에 존재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깃’은 30대 초반의 영화감독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러 갔다가 첫사랑으로 되짚어 돌아오는 마음의 여정이다. 우도에서는 하루에도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다. 구름이 낀 듯싶다가 비가 오고 태풍이 몰려온다. 실제로 촬영 중 태풍이 왔다. 두 주인공이 신 전체를 연기해야 했는데, 배우들이 집중력이 강해서 좋은 표정을 잡을 수 있었다. 포즈와 강약, 호흡이 잘 맞았다. 드라마 투르기(대본과 연기를 통해 듣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가지고 몰입할 수 있도록 허구적 이야기를 구성, 표현하는 모든 기술과 기법)가 있는 영화가 아니어서 감성이 중요한데 마치 감성들을 채집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깃’의 결말이 불만이다. 기다리던 옛 애인은 오지 않고, 쥐띠 띠동갑인 소연과 현성은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한다. 현성이 우도를 떠날 때 삼촌은 소연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부둣가로 달려간다. 떠나는 배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1년 뒤 서울 종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송 감독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종묘에서 만나는 그들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은 산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비일상의 영역 속에서 강렬한 팬터지를 발산하던 인물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었다. 왜 그들을 만나게 했을까?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스태프들은 대부분 두 남녀가 그냥 헤어지는 것보다 종묘 신이 붙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관객들 모니터도 마찬가지였다. 종묘는 지금 서울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서울에 있지만 몽환적이라고 생각했다. 카페나 극장 앞보다는 종묘가 좋았다. 구체적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서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무질서 속에 남아 있는 신화적 공간이다. 나는 관객들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에서 종묘 신을 끝에 붙였다.”

“상업 시스템 버티기 힘들어 … 숨겨진 욕망 다루고파”

‘철수, 영희’처럼 ‘깃’도 1초당 24프레임이 지원되는 파나소닉 DVX 카메라로 찍었다. 다른 디지털 카메라는 초당 30프레임이 지원되기 때문에 극장 필름처럼 초당 24프레임을 지원하는 카메라가 키네코 작업(필름으로 촬영되지 않은 영상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도록 35mm 필름으로 옮기는 작업)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깃’은 서울 4개관에서 개봉한다. 현재 ‘깃’의 판권은 환경재단에서 SBSi로 넘어가 있다. 환경재단에서는 7000만원의 제작비에 프리미엄으로 1000만원까지 얹어서 팔았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현재 이 영화는 CJ엔터테인먼트에서 해외배급을 생각하고 있으며 올해 활발하게 국제영화제를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95년 말부터 99년까지 5년 동안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아직도 4학년이다. 4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와서 졸업을 못했다. 나이를 한참 먹어서도 졸업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마치려고 한다. 학점 개념이 아니라 담당 교수들이 사인을 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문학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나는 마지막 문학세대다. 문지, 창비의 시집을 코트에 넣고 다녔다. 폴란드에서는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녔다. 20대 중·후반을 거기서 보내서, 당시 한국은 문학에서 인터넷 세대로 바뀌었는데 그쪽은 그런 거랑 굉장히 멀어서, 오히려 예술적 감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받았다.”

미완성 기대주 … 사람과 소통을 꿈꾸며

‘거미숲’ 촬영 현장에서의 송일곤 감독.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에 출품할 ‘마법사’는 여자 2명, 남자 2명의 혼성밴드로 구성된 그룹 이야기다. 여자 기타리스트가 자살한 뒤 매년 12월31일 모여서 죽은 친구를 기리며 술을 마신다. 살아남은 여자 보컬에게 베이스 치는 남자가 사랑 고백을 한다. 남자는 몇 달 뒤 아르헨티나로 가는데, 네가 내 마음을 받아주면 안 가겠다고 말한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법사’는 2월 초에 촬영 들어가서 2월 말 끝날 예정이다.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30분 분량은 애매하다는 것이다. 단편이라면 하나의 모티브를 가지고 10분 분량을 만들지만, 30분 분량이면 내러티브는 있는데 끝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80년대 광주 이야기를 하드보일드 형사물로 풀어가는 작품을 ‘봄’ 영화사에서 준비하고 있다.

“ ‘깃’ 같은 영화를 만들면 나는 좋은데 스태프들이 고생을 너무 한다. 내 명분을 위해서 스태프들을 설득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 ‘깃’처럼 단편으로 시작되어서 장편으로 가는 것은 행복한 경우다. 나는 기술적이나 문법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김기덕 감독처럼 영화를 양산할 수도 없다. 형태를 갖춰가면서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좋은 예다.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으려면 자기가 원하는 상상에 맞게 작품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의 재능이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갖고 있다. 힘들지만 ‘꽃섬’이나 ‘깃’의 성취를 밀어붙이는 고독한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완성된 감독이 아니다. 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영화를 찍는 것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다. ‘꽃섬’은 정신이 너무 살아 있었지만 ‘거미숲’을 찍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35억원 예산의 영화를 14억원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주제 자체가 무겁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영화를 끝내고 나니까 그 주인공처럼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 든다. 상업적 시스템에서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다. 미니멀한 것에 대한 애정이 많지만, 가령 ‘장길산’을 스타워즈 에피소드처럼,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펼쳐 보이고 싶은 꿈도 있다. 그리고 펠리니나 베르히만처럼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나 꿈에 대해 다루고 싶은 생각도 있다. 무엇보다 1년에 한두 편 꾸준히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 송 감독의 영화는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만든 영화는 소통에 실패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림 그리는 것처럼, 시 쓰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내 개인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다. 내러티브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적인 상상력을 많이 숨기더라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겠다. 내러티브 자체에 대해 관객들이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영화란 무엇인가?

“처음 영화를 공부할 때, 영화가 사람들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했다. 희망과 꿈꿀 권리와 재미를 주면서 사람들을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회의가 든다. 과연 그런 힘이 있나? 결국 나와 관객의 소통 문제가 아닐까. 이야기는 수천년 전부터 있었고 그 이야기를 표현해내는 예술가들이 수천만명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조금 더 희망이나 꿈을 꿀 권리를 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말대로 영화를 찍는 것은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것과 똑같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찍으러 나간다.”



주간동아 2005.01.25 470호 (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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