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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역사와 사람들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조규순 영세불망비’ 뒷면 조병갑 이름 선명 … 성황산은 동학군의 마지막 격전지

  •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 ‘주간동아’는 이번 주부터 ‘다시 쓰는 택리지’의 저자
  • 신정일이 쓰는 ‘역사와 사람들’을 연재한다.
  • 답사 전문가이자 손꼽히는 인문지리학자인 신씨는 우리 땅 곳곳에 살아 숨쉬는
  • 역사와 옛 이야기, 가족들이 함께 가볼 만한
  • 답사지들을 소개할 것이다. <편집자 주>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태인을 진호했던 진산으로 보이는 항가산이 마을 뒤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죽는다. 무수한 탄생과 소멸을 통해 역사는 진전되어온 것이리라. 정현종 시인의 시 구절처럼 “가고 싶은 자 가게 하고 오고 싶은 자 오게 하라.” 그것에 충실하면 되는데 이미 가버린 것, 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이 남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독일 철학자 니체는 “만물은 가고 오며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고 했다. 니체의 말처럼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번창했다가 흥망성쇠를 겪으며 쇠퇴해간 지역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면 비애라기보다 늦은 가을날 11월과 같은 쓸쓸함일 것인데, 전북 정읍시의 하나의 면(面)이 된 태인(泰仁)을 찾아가는 내 마음 역시 그러했다.

호남선 신태인 지나며 쇠퇴 … 한가하고 심심한 소도시

태인은 백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마을로, 한때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적 드문 소도시로 변모해버렸다.

태인의 이름은 백제 때 대시산군(大尸山郡), 신라 때 태산군(太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태종 9년에 지금의 이름 태인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정읍에 흡수되었다.



태인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바로 옆 솔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는 40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가 차를 나르고, 황혼길에 들어선 어르신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를 한잔 마시며 말을 건넸다.

“태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쇠퇴했지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태인이 이 지역의 중심지였어. 그런데 호남선 열차가 신태인으로 지나가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지. 1960년대만 해도 태인 인구가 2만여명은 되었는데, 지금은 7000~8000명이나 될랑가.”

아직도 다방이 여섯 개나 된다는 태인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데, 내 눈에 비친 태인의 모습은 한가하다 못해 심심하다.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인적 드문 태인 거리.

태인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 제주부터 서울까지 이어지던 삼남대로가 지나던 길이 오늘날 1번 국도가 되었는데, 이 길을 중심으로 면소재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길목에서 찾은 첫 번째 옛 흔적은 태인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태인 동헌(東軒, 전북유형문화재 제75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인 관아의 건축에 관해 정곤이 쓴 다음과 같은 기문(記文)이 실려 있다.

“태인현은 곧 옛 태산과 인의의 고을인데, 아조(我朝)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고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 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 현감 황경돈(黃敬敦)군이 나와서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고관(古館)을 현의 객사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오치선(吳致善)군이 무술년 겨울에 와 고관의 지세를 살피고 후청, 동서침, 낭청 동서행랑을 세웠다.”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이 거닐었던 연지.

태인 동헌을 지나 마을 길을 걷는다. 골목을 돌아나가면 전주로 빠지는 우회도로가 나 있는 하마(下馬)거리라 불리는 삼거리에 향교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 하마거리에서 남녀노소 모두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사라진 자리를 차들은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옛날 태인군의 감옥이 있었다는 옥하(玉下)마을은 저물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 뒤에 병풍처럼 둘러처진 산이 성황산이다. 성황산은 성황신을 모신 산이었는데, 성황당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산 중턱에 현대의 산물인 산장모텔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면 이곳 태인을 진호(鎭護)했던 진산(鎭山)은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 “죽사산(竹寺山)현의 북쪽 2리에 진산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태인 사람들에게 물어도 죽사산을 아는 이가 없었다. 증산교의 한 파인 미륵불교총본부 뒤편에 있는 항가산(恒伽山, 120m)이 진산일 듯싶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태인의 여러 곳에는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의 자취도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최치원은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했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인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

세상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태인을 진호했던 진산으로 보이는 항가산이 마을 뒤로 보인다.

태인 관아·피향정 등 유적에 선조들 발자취 ‘흠뻑’

연꽃이 만발하면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이던 최치원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온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지(蓮池)는 지금도 정자 아래쪽에 남아 있다. 그리고 피향정 북쪽에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도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해인 1885년에 헐리고 원래 있던 상·하 연지 중 상연지는 메워져 시장과 도로가 되고 말았다.

태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칠보면 무성리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는데 이곳도 가볼 만하다. 무성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살아남은 47곳 가운데 하나로,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인에서 살펴보아야 할 역사 유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학의 흔적이다. 피향정 동쪽에는 여남은 개의 공적비가 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이 이곳 태인현감을 지냈던 것을 내세워 주민들의 혈세를 모아 ‘태인현감조규순영세불망비’부터 세웠다.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너무도 선명하고, 뒷면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그 비를 세우며 재미를 본 조병갑이 백성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겠다며 원래 정읍천변에 보(洑)가 있었는데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동진강에 만석보를 만든 뒤 물세를 더 걷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전북 태인, 동진강변 붉은 노을 동학혁명 아픔의 흔적

피향정 동쪽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태인현감조규순영세 불망비’(왼쪽) 등 여남은 개의 공적비가 늘어서 있다.

우금치 싸움에서 패한 동학군이 마지막 싸움을 벌인 곳도 태인의 성황산이다. 결국 이 싸움에서도 진 전봉준은 동학군을 해산하고 입암산 너머 순창의 피노리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관군에게 붙잡힌다. 김개남은 회문산의 종성리에서 훗날의 의병장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히고,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렇듯 시리고 아픈 사연을 간직한 태인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시외버스에 올라 전주로 향했다. 유장하게 흐르는 동진강변에 자리잡은 태인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어디선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가볼 만한 곳 ◀

호남고속도로의 태인나들목(IC)에서 빠져나와 태인으로 들어간다. 연못이 있는 피향정과 향교(만화정 대성, 명륜당 등), 태인 동헌, 증산교의 한 종파인 미륵불교총본부가 가볼 만하다.

태인에서 30번 도로를 타고 칠보로 가면 무성서원과 원백암 남근석, 김동수 고택이 있는 산외면이 지척이다. 30번 도로를 조금 더 따라가면 섬진강 댐에 이르는데, 근처인 쌍치면 피노리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회문산 종성리에서는 또 다른 지도자 김개남이 붙잡혔다.만석보와 황토현 등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도 가깝다.

태인 백학정의 백반이 맛있다.

(문의 063-534-4290)





주간동아 458호 (p66~67)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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