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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팔고 떠날 준비 끝냈는데”

신행정수도 예정지 현지 르포 … 상당수 주민 이주 계획 물거품으로 남은 건 허탈과 분노

  • 대전·연기=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고향 땅 팔고 떠날 준비 끝냈는데”

  •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를 재배하던 심모씨(47)는 지난 3월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받은 피해보상금 5억원에 대출금 3억원을 얹어 조치원 인근의 땅을 구입했다. 평당 40만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반 토막 난 값으로도 팔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고향 땅 팔고 떠날 준비 끝냈는데”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허탈감에 빠진 충남 연기군 농민들.

할아버지, 아버지가 지어먹고 물려준 전답을 나라님 내려오신다기에 벌써 팔았지유. 농협에 빚도 좀 내서 부여에 전답 사놨는데, 이제 와서 안 오신다니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대유. 이젠 조상 부끄러워 제사도 못 올리겠네유.”

10월22일 오후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 면사무소 인근에서 만난 60대 노인 장모씨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지난 봄 외지에서 온 양복쟁이에게 평당 10만원씩 받고 전답을 팔았을 때만 해도 고향 발전을 위해서라면 좀 멀리 가서 농사짓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정부에서 평당 20만원씩은 보상해줄 것’이란 소문이 나돌아 이참에 농사 규모도 넓혀보자며 빚도 졌다. 장씨는 “뭐가 급하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땅을 팔았을까…”라며 가슴을 쳤다.

가을 수확을 마친 논에서 볏짚을 추스르고 있던 최용만씨도 “올 봄 고향 땅을 팔고 신행정수도 예정지 밖에 전답을 사두었다”며 “안 그래도 내년부터 5만원짜리 수입쌀이 들이닥치면 농민들 다 죽을지 모르는 판국인데, 정부는 충청도 농민만 두 번 죽일 작정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예정지 인근 농지 구입자 부지기수 … 싸게 팔기도 어려워

10월21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을 한 직후부터 행정수도 예정 지역인 충남 공주·연기 일대는 충격과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예정 지역 중심지인 연기군 남면 종촌리 일대에 자리한 스무 개 남짓한 부동산중개업소는 일제히 문을 걸어잠갔고, 종촌리 송도고등학교 앞 가건물에 자리한 ‘신행정수도주민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찾는 주민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난 21일 저녁 마을 주민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는 한문수 면장은 “다들 ‘정부 정책에 순응한 사람들만 망하게 생겼다’며 배신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당장 곤란해진 이들은 보상금만 믿고 빚을 얻어 예정지 인근의 농토를 산 주민들. 보상금이 지급되는 내년 후반에는 땅값이 훌쩍 올라 있을 것이라며 미리 이주 계획을 세운 까닭이다. 남면농협 김진호 전무는 “보통 농업자금으로 많아야 수천만원씩 빌려가던 조합원들이 예정지로 확정된 8월 이후에는 농지구입자금 용도로 수억원씩 빌려갔다”며 “개중에는 투기 목적으로 빌려간 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고향 땅 팔고 떠날 준비 끝냈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를 재배하던 심모씨(47)는 지난 3월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받은 피해보상금 5억원에 대출금 3억원을 얹어 조치원 인근의 땅을 구입했다. 평당 40만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반 토막 난 값으로도 팔기 어려운 처지가 된 것.

행정수도 예정지 인근 주민들의 배신감과 허탈감도 예정지 주민 못지않다. 행정수도의 가장 큰 수혜 지역으로 떠올랐던 조치원 주민들은 “앞으로 지역 경기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만 있었는데,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김진식씨는 “전기코드도 한 군데만 꽂아두면 불나는 것 아니냐”며 “위헌 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은 모두 금배지를 내놓으라”고 언성을 높였다.

“고향 땅 팔고 떠날 준비 끝냈는데”

10월23일 오전 연기군 남면 종촌리에 정부를 비난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올 여름 분양권 프리미엄이 2000만∼3000만원까지 치솟았던 조치원읍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 모델하우스 주변 부동산중개업소 일대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황량하기만 했다. 부동산업자 오모씨는 “행정수도가 들어오면 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한 채 구입해놨는데, 위헌 결정 때문에 황금알이 졸지에 계륵이 되어버렸다”며 “누가 촌구석의 고층 아파트에 살려고 하겠느냐”며 답답해했다.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성전경씨(64)는 “사촌동생이 하는 가게인데, 위헌 결정 난 뒤로는 상심이 컸는지 집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온 공인중개업자들이 푸르지오 분양 끝나고 떠난 다음에 땅 매매 알선하면서 돈 좀 벌어볼까 해서 3300만원 주고 이 가건물을 샀지유. 근데 한두 건이나 성사시켰을라나? 헌재를 무사통과하고 나면 다시 한번 투자자들이 몰릴 것으로 기대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농사꾼이 괜히 욕심 냈다가 날벼락 맞은 셈이지유.”

헌재 결정에 반발·후속 선물 기대 ‘두 모습’

한편 충청권의 각 지방의회와 시민단체는 ‘행정수도 건설 계획 백지화’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다. 10월22일 오전 7시30분 충남·북, 대전시 시·도지사가 정부의 신속한 후속 조치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한 공무원들은 “분명 헌재는 행정수도 건설 자체가 위법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관습헌법상 청와대만 내려오지 않으면 수도가 아닌 것 아니냐”라고 쑥덕이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 연기군 의회도 성명을 통해 “신행정수도 건설 사업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중요한 국책사업”이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이날 오전 대전 중구 대흥동 한나라당 시도지부 앞에서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을 연 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지금은 대안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위헌 결정의 논리가 국민을 설득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홍보할 때”라고 주장했다. 연기군 의회의 한 의원은 “만약 영남이나 호남에서 이런 사기극이 벌어졌다면 민란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충청도민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도 점잖게 대응하고 있다고 해서 이번 일을 그냥 넘기겠다는 건 아니란 점을 정부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습헌법’이란 폭탄을 맞은 10월 하순의 충청도 산자락은 이제 막 붉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23일 오전부터 예정지 곳곳에는 ‘우롱당한 자존심 정부가 보상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리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산천이 온통 빨갛게 물들 때쯤이면, 충청도민들도 붉어진 얼굴을 하고 본격적으로 정부 규탄의 목소리를 내게 될까. 한탄의 목소리만 무성할 뿐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충청도는 아직까지 내심 정부의 ‘두 번째 선물’을 기대하는 눈치로 읽힌다.





주간동아 458호 (p22~23)

대전·연기=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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