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2

2004.09.16

민심 저항 파도 맞는 슈뢰더 개혁

실업보조 단계적 삭감 반발 전국서 ‘월요 시위’ … 빈부격차 우려한 옛 동독 지역 더 분노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hanmail.net

    입력2004-09-10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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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은 지금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 만성화된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슈뢰더 정부가 정권의 운명을 내걸고 제시한 개혁정책 ‘하르츠 IV(Hartz IV)’가 국민들의 대대적 저항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매주 월요일 저녁 6시 독일 각 도시 중심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들이 모이는 이유는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희망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다. 일명 ‘월요 시위’라고도 불리는 이 집회는 몇 달 전 옛 동독 지역인 마그데부르크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독일 전체에 나타나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큰 도시가 밀집되어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만 해도 쾰른, 보쿰 등 20여개 도시에서 월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옛 동독 지역에서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돈먹는 하마 실업자 관리 ‘고민’

    그야말로 평범하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한다. 이들 모두는 ‘하르츠 IV’ 정책이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독일사회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끝없는 나락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 이것이 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매우 발달된 나라다. 헌법도 독일을 ‘사회국가’(Sozialstaat,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개념임)로 규정하고 있다. ‘복지국가’ 이념도 독일에서 비롯했다. 독일의 여러 사회보장제도 가운데 핵심 항목은 ‘실업보조(Arbeitslosen-hilfe)’다. 국가가 실직한 근로자에게 기존 급여의 3분의 2가량을 지원하는 것이다. 갑자기 소득이 끊긴 국민이 새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곤궁에 처하지 않게 정부가 직접 챙겨주는 것.

    그런데 문제는 실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새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동청이 일자리를 알선해줘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하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돈이 절로 생기는데, 굳이 직장을 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생각은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독일의 장기 실업자 비율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리하여 현재 정부가 실업보조로 지출하고 있는 돈은 해마다 700억 유로(약 100조원)가 넘는다.

    실업자를 관리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돈을 쓰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당연히 독일 경제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때 전 세계에서 ‘독일이 이룬 복지국가로서의 위대한 성취’라고 칭송받던 실업보조가 이제는 독일이 앓는 만성질환의 원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초창기 슈뢰더 정부는 실업자 문제 해결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집권하던 1999년은 경제 호황기였다. 인구 통계면에서 볼 때도 앞으로 몇 년 이내 구직해야 할 젊은 세대의 수가 적었다. 때문에 “손놓고 있어도 25만명의 실업 구제가 나타날 것”이라는 속편한 얘기가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세계경제의 전반적 침체 속에 9·11테러가 일어나는 등 국제 정세가 불안해졌다. 독일 경제는 성장을 멈췄고, 실업률이 크게 늘어났다.

    곤경에 처한 슈뢰더는 2002년 총선을 앞두고 페터 하르츠(Peter Hartz)를 위원장으로 한 개혁위원회를 긴급 소집했다. 개혁위원회는 이후 여러 가지 개혁 법안을 제안했다. 이중 사회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 법안이 바로 ‘하르츠 IV’다. 핵심은 실업보조금을 연차적으로 줄여 실업 3년차가 지나면 최저생활비 정도만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최저생활비는 현재 서독 지역이 월 345유로, 옛 동독 지방이 월 331유로다. 궁핍해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일자리를 얻는 일에 성의를 보이라는 일종의 압력인 셈이다.

    법안 반대했던 민사당 인기 급상승

    ‘하르츠 IV’는 일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 매체를 통해 내년 1월부터 법안이 발효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구직센터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법안이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생활하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처사라며 분노하고 있다.

    옛 동독 지역 사람들은 ‘하르츠 IV’를 동독과 서독을 차별하는 대표적인 정책 사례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통일 당시에는 동독 지역 발전에 열의를 다한다고 말하더니, 모든 것이 공염불이었다는 주장이다. 개혁정책으로 옛 동독 주민들만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항변도 들린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시위를 하던 한 50대 남자는 시사잡지 ‘슈피겔’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 당시 정부는 생활수준을 비슷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통일 14년 만에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생활수준이 서독과 비슷해진 것이 아니라 폴란드와 비슷해졌다.”

    월요 시위는 15년 전 옛 동독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라이프치히 월요 집회’를 떠올리게 한다. 국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은 단순히 ‘하르츠 IV’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현실에 대한 분노, 암울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서독 사람들이 이 정책에 불만스러워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독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복지국가의 이념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한다. 슈뢰더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정책”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일종의 후퇴이며, 분배를 강조하는 좌파 정당의 이념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심을 정확히 읽고, 그들 주장을 대변하면서 등장한 인물이 과거 사민당 당수를 역임한 오스카 라퐁텐(Oscar Lafontaine)이다. 한동안 잊혀졌던 그가 한 달 전 슈뢰더가 좌파 정당의 이념을 버렸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현재 사민당 소속인 그는 분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정통 좌파 정당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말로 라퐁텐이 좌파 정당의 기치를 높이 들고, 몇몇 의원들이 그를 따라 움직인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현 집권 여당인 사민당-녹색당 연정은 국회 과반수를 겨우 3석 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몇몇 의원의 탈당은 현 정권의 붕괴, 새로운 정권의 출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복잡하게 얽힌 현 정국에서 최대 이익을 얻고 있는 정당은 옛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이다. 주요 정당 가운데 유일하게 민사당만이 하르츠 IV 법안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민사당의 인기가 크게 높아져 9월19일에 있을 작센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 지방의회 선거에서 제1당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선거에서는 심지어 극우 나치 추종세력인 NPD까지도 하르츠 IV 반대에 앞장선다는 이유로 상당히 선전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한때 복지국가의 모델로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던 나라, 그리고 냉전시대의 산물인 분단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로 평가받던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나라에 많은 시사를 해주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독일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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