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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요트로 세계일주? 모험심 있으면 OK”

18개월간 4만5000km 항해 루시 라이언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요트로 세계일주? 모험심 있으면 OK”

“요트로 세계일주? 모험심 있으면 OK”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는 대부분 직장인들에게 염원이었으되 현실이진 못했다. 얄팍한 월급봉투에 가족과 미래를 걸지 않은 직장인이 얼마나 있으랴. 그러나 이 광고 문구를 그대로 실천한 여걸이 있다. 영국인 루시 라이언(Lucie Ryan·35).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4인용 요트에 몸을 맡긴 채 전 세계 바다를 누빈, 어쩌면 콜럼버스보다 모험심이 강한 여성이다.

“깊은 밤 남태평양에서 보았던 은하수와 유성을 잊지 못해요. 그건 도시의 밤하늘과 전혀 다른 광경이었어요. 바다와 하늘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고, 드넓게 펼쳐진 별들은 눈부시도록 환해요. 요트 위에 드러누운 내가 이 장관의 유일한 관객이죠. 이건 정말 엄청난 특권이에요.”

태풍 ‘메기’가 몰고 온 비바람이 걷힌 8월19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루시를 만났다. 그는 1999년 11월부터 무려 18개월 동안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남편을 따라 한국에서 살고 있다. 남편 데릭 플레처(Derek Fletcher)씨는 글로벌기업의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는 비즈니스맨. 이들 부부가 한국에 산 지 벌써 3년째다.

어느 날 사표 던지고 바다로 … 여행 중 남편도 만나

99년 11월 루시는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지브롤터에서 열린 세계일주대회에 참가했다. 영국 식민지인 지브롤터는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양교통의 요지. 때문에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국가들 간의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진 곳이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경관과 해양스포츠에 적합한 기후조건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세계일주대회는 요트를 타고 지브롤터를 출발해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을 거쳐 다시 지브롤터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무려 4만5000km가 넘는 거리를 항해하는 ‘지구 한 바퀴’의 강행군. 요트마다 4~5명이 승선, 총 20여개 요트가 함께 항해에 나섰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항해 릴레이를 펼치다 세계 각국의 항구에 2∼3일씩 정박하며 휴식을 취한다.

“항해하는 동안 어디를 들러보았느냐”는 질문에 루시는 손가락으로 지구본 위를 차근차근 짚어나갔다. 파나마, 갈라파고스, 폴리네시아, 통가, 피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지구본이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루시는 항해에 대한 전문지식을 배우지 않았다. 그녀가 탄 요트의 선장은 친구의 남편. 루시는 “선장이 요트를 진두지휘하고, 나는 그저 요리와 청소를 도맡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여자가 육지도 아니고 바다를 이토록 오래 항해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도전 아닐까?

“모험심만 있다면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요. 5살, 8살, 11살인 아이들, 심지어는 아기를 안고 참여한 부부들도 있었어요. 태평양 한가운데서 부모가 내준 숙제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내일은 당신의 남은 인생 첫날 … 일단 떠나보세요”

99년 루시는 문득 ‘너무 오랫동안 판에 박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오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일주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그 사이 우여곡절도 있었다. 요트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자, 루시는 슬픔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다시 세계일주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 5월. ‘의기소침하지 말고 모험을 계속하라’는 생전의 아버지 말씀이 용기가 됐다. 루시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지만 여행은 아버지를 정리할 충분한 시간을 줬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픔이 아닌 인생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했다”고 고백한다.

“요트로 세계일주? 모험심 있으면 OK”

요트 안 객실에 앉아 있는 루시 라이언.

바다 위의 세계일주는 무척이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특히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일대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한가득 선사했다. 한 떼의 돌고래들이 요트의 엔진소리가 재미있는 듯 요트 주위를 둘러싸며 요트와 함께 달리곤 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섬뜩한 상어 떼도 가끔씩 제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보다 큰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도 했다. 판타지 만화 같다고? 루시에겐 현실 속의 모험이었다.

“원주민들을 만나는 것도 요트 여행의 묘미였어요. 통가에서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원주민들과 전통음식을 나눠먹었어요. 아이들은 어느 나라이건 모두 천사처럼 예쁘더라고요.”

그러나 바다는 때때로 무서운 존재로 돌변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고 집채만한 파도가 요트를 덮칠 때는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는 절규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 항해했을 때는 남대문보다 두세 배 큰 파도가 쉴새없이 밀려왔다고 한다. 꼬박 이틀간 선장의 지휘에 따라 이리저리 요트의 중심을 잡아가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무서운 건 악천후와 거친 파도뿐만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엄청 큰 유조선이 우리 요트를 향해 돌진해왔어요. 아무리 무선 연락을 취해도 응답이 없었죠. 간신히 요트의 방향을 돌려 피하긴 했는데, 어휴, 등골이 오싹했죠.”

대서양을 건널 때는 무려 20일 동안 육지에 닿지 않은 채 항해를 계속했다. 연료를 아끼느라 바람에 의존해야 했는데, 바람이 잠잠할 때면 하루 이틀씩 꼼짝없이 바다 한가운데 서 있곤 했다. 책 읽고, 낱말 맞추기를 하며,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할 일이 없으면 세상 시름을 잊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심해(深海)의 평온. 루시는 그동안의 생애 동안 이토록 평온한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행은 그에게 사랑도 선사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해 찾은 레스토랑에서 우연하게 남편 일행과 마주쳤다. 데릭은 루시의 모험심에 호감을 느꼈고, 루시는 데릭의 친절함에 반했다. 이후 여행에서 루시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컴퓨터를 찾았다. 어김없이 데릭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둘은 그렇게 사랑을 키웠다. 루시는 “남편은 세계일주여행이 준 가장 큰 선물”이라며 웃는다.

루시는 서울생활이 즐겁다고 한다. 남산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보는 일도,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겁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바다와 멀리 떨어진 서울에서는 항해를 즐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루시는 요즘 한강에 욕심을 낸다. 한강이야말로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한국의 관광자산이라는 것. 새하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한강 둔치?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머릿속으로만 마르코 폴로나 콜럼버스 못지않은 모험을 상상하는 이들에게 루시는 “수만 킬로미터의 항해는 첫 번째 걸음에서 시작하며, 내일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바다는 힘이자 아름다움이에요. 한순간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과시하다가도 온순해진 뒤에는 유영하는 돌고래와 반짝이는 물빛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냅니다. 일상생활의 지루한 틀을 깨고 싶다면 여행을 하세요. 싫다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잖아요. 적어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주간동아 450호 (p62~63)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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