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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의 성(性) | 성욕과 로마서 7장2절

성욕에서 자유로운 인간 있으랴

‘내 속의 죄’ 통제 불가능한 내면의 갈등 … 사도 바울 “유혹의 구덩이서 건져달라” SOS

  • 조성기/ 소설가

성욕에서 자유로운 인간 있으랴

성욕에서 자유로운 인간 있으랴
현대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빈 해리스는 1989년 자신의 책을 펴내면서 ‘아워 카인드(Our Kind)’라는 제목을 붙이고 부제로 세 가지 질문을 보탰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부제만 보면 사뭇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류에 대한 생태학적인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작은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책을 읽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작게 느껴지기보다 복잡하고 비밀스러워 오히려 크게 느껴지는 편이다. 그 책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에 대해 저자의 독특한 관점에서 통찰력 있는 분석을 가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 동물실험 죽을 때까지 쾌락 탐닉

성욕 부분을 다루는 장에서 식욕과 비교해놓은 대목이 흥미롭다. 충동과 욕구의 면에서 성욕이 강한가, 식욕이 강한가. 배고픔이 극도에 달하면 식욕이 성욕을 완전히 눌러버리게 된다. 빨치산의 활동상을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공개한 이태의 ‘남부군’에서도 남녀 빨치산들이 배고픔과 추위로 극한상황에 이르면 서로에 대해 성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욕이 오래도록 채워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식욕이 성욕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왕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식욕도 적당히 채울 수 있고 성욕도 적당히 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성욕이 식욕을 쉽게 물리쳐버린다. 더 나아가 성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며 자신의 재산과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성욕은 에이즈를 비롯한 온갖 성병을 무릅쓸 정도로 끈질기다. 성적인 쾌락에 대한 추구는 향정신성 약물에 탐닉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사람의 몸은 자극을 받으면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을 내부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어 투여한다.



그런데 학자들의 오랜 연구에도 성적 쾌락의 생태학적인 메커니즘은 여전히 자연의 일급비밀로 남아 있다. 다만 동물 실험결과 뇌의 일부에 쾌락 센터라는 곳이 존재해 이 센터에 전달되는 전류자극을 받으려고 쥐나 고양이들이 유난히 애를 쓴다는 사실은 밝혀진 바 있다. 쾌락 센터를 전류로 자극하는 버튼과 음식과 물이 나오는 버튼을 개와 고양이에게 주고 실험을 해보았더니 그 동물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죽을 때까지 쾌락 버튼만 눌러댔다.

인간은 그 동물들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빈 해리스가 성적 쾌락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그 장에서 로마서 7장2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빈 해리스는 성적인 갈등으로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로마서 7장을 두고 신학자들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오랫동안 논란을 거듭해왔다. 가장 큰 논점은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회심하고 난 후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로마서 7:18-23)

성욕에서 자유로운 인간 있으랴

빨치산 출신의 작가 이태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 ‘남부군’에서 배고픔과 추위로 극한에 이른 빨치산들은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내면의 갈등을 이만큼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구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치열하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표현할 수 없는 글이다.

내면의 갈등이 성적인 갈등뿐이겠느냐마는 마빈 해리스도 지적했듯이 인간의 욕구 중에서 성욕만큼 끈질긴 것도 없다고 하니 로마서 7장의 표현은 성적인 갈등에 가장 잘 적용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7장에서 ‘원치 아니하는 바 악’ ‘원치 아니하는 그것’ ‘내 속에 거하는 죄’ 등은 통제되지 않는 성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선한 것’, ‘원하는 바 선’ 등은 성욕의 절제 내지는 억제를 가리킬 것이다. 성욕을 절제하고 억제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고, 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엉뚱한 방향으로 발산되고 마는 상황을 로마서 7장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런 갈등이 되풀이되고 정신적인 패배를 자주 겪게 되면 결국 사도 바울과 같은 탄식을 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이 탄식으로 인해 로마서 7장의 진실성과 절박성은 더욱 배가된다. 곤고하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깊은 강이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와 흡사하다. 이제는 물밑으로 가라앉아 죽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사망의 몸’이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으니 건져주는 자가 필요하다.

‘사망의 몸’을 그 당시 로마 사형제도와 관련하여 언급하는 학자들도 있다. 바울 당시 로마 사형제도에는 합시형(合屍刑)이라는 것이 있다. 살인을 하여 사형언도가 내려진 사람에게 그가 죽인 시체를 함께 묶어두는 형벌이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서울에서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는데, 로마시대 합시형으로 하면 그 범인은 수십 구의 시체와 함께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음욕 품었으면 간음’ 예수 성적 갈등에 엄격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시체가 등에 묶여 있다고 상상해보라. 시체는 썩어가고 있고 ‘살인의 추억’은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으며 사형 집행일은 하루하루 다가오는 상황에서 대부분 미쳐버리기 십상이다.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 자아, 즉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자신은 등에 묶여 있는 시체인 셈이다. 성적인 갈등에서 패배할 적마다 연쇄 살인범과 같이 등에 묶이는 시체는 계속 늘어난다.

이렇게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자가 누구인가.

바울은 깊은 탄식을 발한 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찬양의 노래를 하고 있다. 너무나 극적인 반전이라 얼떨떨하기까지 하다. 결국 예수가 건져주었다는 신앙 간증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건져주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는 성적인 갈등에 대하여 엄격하기 그지없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태복음 5:27-29)

이 말은 자기들은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거룩한 척하고 있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말씀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하였다니.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예수가 왜 이다지도 강경한 말씀을 하였을까. 그것은 이 말씀 앞에서 바울의 표현대로 곤고하기 그지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욕의 구덩이에서 건져짐이 필요한 자신을 깨닫고 바울처럼 탄식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영혼의 ‘에스 오 에스(SOS)’를 간절히 외쳐대는 자들을 예수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이다.



주간동아 450호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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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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