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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멕시코인들‘납치 공포’오들오들

3시간 1명꼴 무고한 시민 피해 급증 … 짧은 시간 고소득(?) 잡범들도 가세

  • 멕시코시티=한동엽 통신원 boracap@hanmail.net

멕시코인들‘납치 공포’오들오들

멕시코인들‘납치 공포’오들오들

납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이민을 선언한 멕시코 출신 여가수 탈리아.

멕시코인들은 밤늦게 택시를 타거나 누군가를 집에 초대했다가 늦은 시간에 택시를 이용해 돌려보낼 때 걱정이 앞선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택시를 이용해야 할 상황이 되면 택시 번호판을 확인하고 적어두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 택시가 자신, 또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납치할 수 있는 흉악범죄의 도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월9일 멕시코시티에서 시사회를 한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맨 온 파이어(Man on fire)’를 비롯해 ‘납치’는 영화의 단골소재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3시간마다 1명꼴로 납치를 당하는 것이 일상적인 현실 세계다.

6월27일 25만명의 멕시코인들이 당국의 치안정책을 규탄하며 침묵 가두시위를 벌였다. 멕시코 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가한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평화’를 달라고 요구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급증하는 흉악범죄에 대해 정부가 강력히 대처할 것을 호소했으며, 특히 ‘납치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외쳤다.

콜롬비아 뒤이어 ‘납치 공화국’ 오명

하지만 ‘평화시위’는 여야의 정치 공방으로 외면당했고, 급기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22일에는 1997년 ‘멕시코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됐던 여의사 카르멘 구티에레스 박사가 집 근처에서 무장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사는 다음날 한 개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수사에 나선 경찰이 30일 납치조직을 검거했는데, 이 조직은 전직 경찰관과 구티에레스 박사의 정원관리사, 그리고 사설 경비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7월31일 멕시코 최고 인기가수 탈리아는 “조국보다 내 생명이 더 중요하다”며 미국 이민을 선언했다. 탈리아의 가족들은 그동안 납치범의 협박전화에 시달려왔으며, 탈리아의 여동생인 에르네스티나 소디는 이미 한 차례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으로 멕시코는 내전 중인 콜롬비아에 이어 ‘세계 최고의 납치국가’가 돼버렸다. 2년 전 납치범죄가 기승을 부려 “이 땅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많은 이들이 조국을 등졌던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멕시코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국제범죄과학센터’가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납치위험국가 10개국’ 가운데 멕시코는 순위권 밖이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멕시코의 납치범죄는 98년부터 멕시코 정부가 마약 밀매단 등 조직범죄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함에 따라 기반이 약화된 범죄조직이 마약에서 부유층을 상대로 한 납치로 눈을 돌리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만 해도 납치의 대상은 일부 부유층에 한정됐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짧게는 한두 시간에서 길게는 5일까지 피해자를 억류하는 ‘급행납치’라는 신종 범행 방식이 등장하면서 멕시코인들은 ‘납치공포’에 떨게 됐다.

급행납치범들은 피해자를 납치한 뒤 피해자의 현금카드 등으로 은행에서 예금을 찾은 뒤 풀어준다. 그러나 카드로 하루에 3000페소(약 33만원) 이상 찾을 수 없는 멕시코 은행 시스템으로 인해 납치범들은 계좌의 돈을 모두 찾을 때까지 피해자들을 풀어주지 않는다.

조사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제인단체에서는 지난 한 해 1200여건의 납치범죄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 보안자문회사인 ‘크롤’은 3000건 이상의 납치범죄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 두 발표를 종합해보면 멕시코 어디에선가 3~8시간마다 1명꼴로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멕시코 연방검찰은 169건의 납치에 대해서만 납치범들과 협상을 벌였으며, 19개의 조직과 연관된 용의자 114명의 신원만을 확보했을 뿐이다.

납치범죄의 57%가 집 근처에서 벌어지며, 피해자 가운데 90%가 여성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대형 쇼핑몰의 주차장도 납치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납치범이 요구하는 금액은 5만 페소(약 550만원)에서 수백만 페소에 달해 부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더욱 커졌다.

더욱이 지난 수년간에 걸쳐 멕시코와 미국 국경 인근 후아레스 주(州)에서 벌어진 300명 이상의 여성 실종사건이 ‘장기매매를 위한 납치’일 것이란 가능성이 짙어지면서 이제 납치 대상과 목적은 더욱 폭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 형법에 따르면 납치범죄에 대해서는 15~7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납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경찰에 대한 불신으로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납치범죄 신고율은 10%가 채 안 되며, 납치범에 대한 기소율은 5%에 그친다.

“신고된 납치사건 가운데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것은 15%에 불과하며, 납치조직의 70%가량이 전직 경찰을 조직원으로 두고 있거나 경찰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다”는 통계는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단순한 노파심이 아님을 보여준다.

전문 협상가·방탄차 사업 호황

멕시코인들‘납치 공포’오들오들

‘납치’를 주제로 한 영화‘맨 온 파이어’의 장면들.

멕시코시티와 인접한 모렐로스 주(州)의 카를로스 페레도 주지사가 “경찰들이 납치수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예 새로운 범죄단체를 구성한다”고 밝히고 있듯,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게 일반 시민들의 생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반 잡범들조차 짧은 시간에 고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다른 범죄보다 오히려 안전한(?) 납치범죄에 가담하고 있다. 전직 경찰이나 사설보안업체 직원은 물론 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는 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까지 납치조직에 가담할 정도다.

8월2일에는 부유층으로 인식되고 있는 유대인만을 노리는 ‘유대인 전문 납치조직’ 7명이 검거됨으로써 ‘납치의 전문화’까지 시도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덕분에 납치 전문 협상가가 등장하는가 하면 방탄자동차 개조사업과 사설경비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방검찰이 납치조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것으로 드러난 전국 규모의 260여개 사설경비업체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믿을 것 없는 멕시코’가 돼버렸다.

2000년 폭스 정부가 들어선 이래 멕시코 주재 해외 기업인들은 정부에 ‘심각한 치안문제’를 지적하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멕시코 지사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급기야 8월5일 멕시코 의회는 1~2시간의 급행납치에 대해서도 최고 40년형을 선고할 수 있는 내용의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납치범죄에 대한 신고나 수사 자체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개정된 법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2002년 폭스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강력범죄는 더욱 늘었으며, 특히 납치범죄는 해마다 2배 가까이 증가하고 있다. 폭스 대통령은 “멕시코 전체에서 벌어지는 납치범죄 가운데 절반 이상이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로페스 오브라도르 시장의 무능력을 비판하며 정치공세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와 멕시코시티 당국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정치 공방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무고한 시민이 3시간마다 멕시코 어디에선가 납치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주간동아 449호 (p56~57)

멕시코시티=한동엽 통신원 boraca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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