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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빨리, 멀리 뛴 사람’ 없었다

올림픽 金 9개, 세계선수권 金 8개 넘볼 수 없는 육상 신화 … 20세기 ‘최고의 선수’ IOC도 공인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younlo54@yahoo.co.kr

그 앞에 ‘빨리, 멀리 뛴 사람’ 없었다

그 앞에 ‘빨리, 멀리 뛴 사람’ 없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칼 루이스는 멀리뛰기 4연패를 달성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부부’가 나란히 올림픽 100m 출전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2004 아테네올림픽 미국 대표선발전에 출전한 육상 100m 세계기록(9초78) 보유자 팀 몽고메리와 아내인 ‘단거리 여왕’ 메리언 존스가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것. 이로 인해 부부는 ‘칼 루이스의 불멸의 기록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1998년 9월14일 미국 휴스턴시의 로버트슨스타디움에서 15년간 세계 단거리 육상계를 휩쓸어온 육상 영웅 칼 루이스의 은퇴식이 거행됐다.

칼 루이스는 84년 LA올림픽 4관왕, 88년 서울올림픽 2관왕, 그리고 84년 LA올림픽부터 96년 애틀랜타올림픽까지 올림픽 멀리뛰기 4연패 등 올림픽대회에서 따낸 금메달이 무려 9개에 이르고, 세계 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8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 최정상 무대인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모두 17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 특히 은퇴를 앞둔 96년 애틀랜타올림픽 멀리뛰기 경기에서 보여준 놀라운 승부 근성과 집중력은 육상 팬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15년간 세계 단거리 육상 휩쓸어

칼 루이스는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해 100m에서 10초 벽을 돌파한 9초99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2위인 미국의 샘 그래디는 10초19로 칼 루이스의 기록보다 0.2초 뒤졌다. 100분의 1초를 다투는 100m에서 0.2초는 매우 긴 시간이다. 칼 루이스는 200m에서 19초80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는데, 2위인 미국의 커크 보브 티스는 19초96으로 칼 루이스에 0.16초 뒤졌다. 이어 칼 루이스는 400m 계주에서 미국 팀의 일원으로 출전해 37초83의 기록으로 2위인 자메이카 팀(38초62)을 여유 있게 따돌린 뒤 금메달을 획득했다. 칼 루이스의 진가는 멀리뛰기에서 더욱 발휘됐다. 2위인 호주 그레이 허니(8m24cm)보다 무려 30cm나 앞선 8m54cm를 뛰어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로써 그는 48년 전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미국의 제시 오웬스가 세웠던 육상 4관왕(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의 위업을 똑같이 재현했다. 4관왕을 재현하기 전 세계 육상계는 제시 오웬스의 기록을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 선수가 100m와 200m 2관왕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전문화된 멀리뛰기까지 제패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칼 루이스 이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0m와 멀리뛰기 모두 우승을 차지한 남자 선수는 단 1명도 없다. 더구나 400m 계주까지 우승하려면 그 나라의 육상 수준이 세계 정상권에 올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칼 루이스는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다소 행운이 따라 2관왕에 올랐다.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나중에 박탈당함)을 세운 캐나다의 벤 존슨이 경기 종료 후 실시된 도핑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되면서 2위(9초92)이던 칼 루이스는 금메달을 땄고, 3위와 4위에 머물렀던 영국의 린포드 크리스티(9.97초), 미국의 캘빈 스미스(9.99초)가 각각 은•동메달을 받았다. 칼 루이스는 200m에서는 영국의 조 델루치(19초75)에 밀려 은메달(19초79)에 그쳤지만 멀리뛰기에서 8m72cm를 뛰어 은메달을 딴 미국의 마이크 포웰(8m49cm)을 23cm 차로 제치고 2연패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참가한 칼 루이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너무 늙었다는 것. 그러나 이런 평가를 비웃듯 그는 2위 마이크 포웰(8m64cm)의 기록에 불과 3cm 앞선 8m67cm로 멀리뛰기 3연패에 성공했다. 계주에서도 미국팀은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96년, 홈인 애틀랜타에서 치른 올림픽에서는 8m50cm를 뛰어 멀리뛰기 올림픽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한다.

멀리뛰기에서 9번째 금메달을 손에 쥔 뒤 그는 욕심을 낸다. ‘금메달 10개’가 그의 꿈이었다. 400m 계주 미국 대표팀의 멤버가 아니었는데 그중 한 자리를 희망한 것이다. 자신이 과거에 뛰어난 단거리 선수였고, 또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400m 계주 팀의 일원으로 달리는 것을 원하니까 자신을 400m 계주 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CNN 방송의 여론조사 결과 과반을 넘는 미국 국민 다수가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칼 루이스의 400m 계주 출전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 10개를 채우기 위한 출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400m 계주 출전 요구 ‘옥의 티’

첫째, 칼 루이스는 100m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400m 계주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400m 계주 팀에 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둘째, 미국 단거리 대표팀 코치가 애틀랜타올림픽 개막 직전 칼 루이스에게 400m 계주 대표팀의 후보선수로서 훈련에 참가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냐”면서 거절했다. 셋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뛰든 뛰지 않든 미국팀이 무난히 금메달을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칼 루이스 또한 바로 그 점 때문에 뒤늦게 400m 계주에 출전하는 데 집착했던 것이다.

팬들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광을 빛내겠다는 것은 스포츠맨답지 않은 비열하고 약삭빠른 생각”이라고 비아냥거렸다. 400m 계주 출전 요구는 그의 육상 인생에서 결국 옥의 티로 남는다. ‘절친한 친구’ 르로이 버렐이 병을 핑계로 자신의 자리를 칼 루이스에게 양보하려 했지만 칼 루이스는 결국 출전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팀(38초05)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캐나다 팀(37초69)에 뒤져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칼 루이스는 자신의 탐욕 때문에 기존의 대표 선수들이 심리적 동요를 일으켜 부진한 성적을 거두게 됐다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기록은 영원하다. 1999년 12월15일 IOC(국제올림픽위원회)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위원장 등 전문가 6명의 심사를 거쳐 칼 루이스를 20세기 최고의 하계올림픽 남자선수로 뽑았다. 칼 루이스가 1896년 그리스에서 하계올림픽이 시작된 이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까지 치러진 20세기 하계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최고의 영웅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주간동아 2004.07.29 445호 (p76~77)

기영노/ 스포츠평론가younlo5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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