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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盧의 고민, 박정희 때와 닮았네!

파병·석유 위기·미군 철수 등 같은 상황 … 朴은 경제·안보 위해 민주주의 희생, 盧의 선택은?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盧의 고민, 박정희 때와 닮았네!

盧의 고민, 박정희 때와 닮았네!

2003년 8월31일 대형수송기를 타고 오산비행장에 처음 전개된 스트라이커 부대

주한미군 3600여명의 이라크 차출과 주한미군 재배치 소식이 알려진 뒤 세간의 관심은 ‘(미국의) 세계방어 태세 일람’으로 번역될 수 있는 GPR(Global Defense Posture Review)로 쏠렸다. 미국과 해외 주둔 미군을 재배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GPR는 그러나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GPR는 어떤 내용을 담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확정됐을 때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미 국방부의 럼스펠드 장관과 월포비츠 부장관, 파이스 정책담당 차관 등은 여러 연설에서 GPR에 대해 언급했다. 이중에서도 2003년 12월3일 더글러스 파이스 차관이 워싱턴DC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세계방어 태세의 개혁(Transforming the US Global Defense Posture)’이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은 GPR의 방향을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 꼽힌다.

파이스 차관은 이 연설에서 미 국방부는 반(反)테러전쟁이나 우방국과의 국방회담 같은 일상적인 업무와 함께 미군을 개혁하는 장기간의 과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개혁이 바로 GPR의 핵심인데, 파이스 차관은 “이는 전체 미군의 능력과 병력, 주둔지와 형태, 그리고 동맹국과의 관계까지도 새롭게 조종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미국, 세계 병력지도 새판 짜기 한창

파이스 차관은 개혁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로 냉전 종식을 거론했다. 소련과의 냉전이 첨예하던 시절 미국이 가장 우려한 점은 소련의 선제 핵공격이었다. 소련이 먼저 핵공격을 가하면 미국은 초토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에도 바닷속에서 1년 가까이를 지낼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는 거의 파괴되지 않는다. 미국은 이러한 장비에 탑재된 핵무기를 발사해 30여분 후 역시 소련을 초토화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 그러니 나를 공격하지 말라’는 이 전략을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또는 ‘상호확실파괴 전략’이라고 한다. 이 전략을 구사할 당시 미국은 소련의 공격을 분산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병력과 무기를 배치해놓았다. 대표적인 분단국가인 서독에는 7군과 5군단을, 한국에는 8군과 1군단을 배치해놓았던 게 그 예다.

盧의 고민, 박정희 때와 닮았네!

초고속 수송함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7월1일 독일은 통일됐다. 그리고 91년 소련이 무너짐으로써 냉전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이스 차관은 “냉전 후 러시아는 미국의 친구가 됐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친구로 돌아선 뒤 미국에 맞설 만한 국가로는 중국이 거론되나, 중국이 미국을 때릴 수 있는 핵미사일은 20기에 지나지 않는다. 미 본토를 때릴 수 있는 중국의 핵전력은 냉전시기 소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그치므로 미국은 다른 국방전략을 택할 수 있다. 여기에 다른 변화가 추가됐다.

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것이다. 가상 적이 사라지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지역이나 세계 평화에 개입하는 새로운 역할을 찾게 됐다. 파이스 차관은 그 실례로 99년 NATO가 코소보 전쟁을 주도한 것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들어갔을 때 NATO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안보지원군으로 활동한 것,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폴란드군을 NATO가 지원한 점 등을 거론했다.

盧의 고민, 박정희 때와 닮았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에 맞서면서도 때로는 이용하고 협조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이는 전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미국을 정면으로 위협한 9·11테러가 2001년 일어났다. 테러세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며 국경을 넘어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또 미국에 저항하는 불량국가(rogue states)로부터 무기 등을 몰래 지원받고 있다. 여기서 테러세력에 대한 선제공격 이론이 등장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이들을 숨겨준 탈레반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리고 강력한 반미 테러지원 세력으로 지목해온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이라크전은 GPR 확정짓는 시험무대

이러한 세력과 싸우는 데는 재래식 무기가 필요하다. 또 테러범을 추적하려면 재빨리 추적에 나설 수 있는 신속기동군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이러한 부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신속배치군 창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2003년 이를 완성해 스트라이커 부대로 명명했다. 2003년 스트라이커 부대는 대형수송기와 초고속수송함을 이용해 한국에 처음 배치됨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전쟁은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므로 모든 부대를 경무장의 스트라이커 부대로 만들 수 없다. 지금 미국은 ‘10개 육군 사단 중에서 몇 개를 스트라이커 부대로 만들고 몇 개를 지금과 같은 중무장 사단으로 남겨놓느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미국이 수년 전부터 GPR를 검토해왔음에도 선뜻 이를 확정하지 못한 이유는 이 비율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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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주한미군 차출 통보를 받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이런 가운데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다양한 부대를 순환 전개하며 몇 개 사단을 스트라이커 부대로 바꾸는 것이 좋을지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라크전은 GPR를 확정 짓는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스트라이커 부대는 테러를 당하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5분 대기조’로 있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긴급히 투입된다. 미국은 스트라이커 부대가 주둔하는 곳을 ‘전력투사근거지’로 번역되는 ‘PPH(Power Projection Hub)’로 명명했다. PPH는 가장 안전한 곳에 두어야 하는데, 미국 본토나 영국 일본 등이 후보지가 될 전망이다.

한편 한국처럼 위험이 상존하는 우방국에는 많은 병력과 장비를 주둔시켜놓아야 한다. 미국은 이러한 곳을 ‘주요작전기지’로 번역되는 ‘MOB(Main Operating Base)’로 명명했다. 한국은 MOB과 함께 유사시 병력이 동원되는 PPH 기능도 맡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로는 ‘전진작전기지’로 번역되는 ‘FOB(Forward Operating Base)’이다. FOB는 최전선에 배치된 부대이므로 코소보 전쟁이나 아프간·이라크 전쟁과 그 후 그곳에 만든 미군기지를 가리킨다. FOB는 위기가 커지면 PPH 등에서 증원군이 달려와 커졌다가 사태가 안정되면 급속히 줄어드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라크 사태가 안정되고 이라크가 친미국가로 완전히 전환된다면 이라크는 FOB에서 MOB로 격상할 수도 있다.

마지막이 ‘안보협력지역’으로 번역되는 ‘CSL(Cooperative Security Location)’인데, CSL에 속하는 나라에는 미군이 상주하지 않는다. 대신 미국은 정기적으로 미군을 보내 그 나라 군대와 연합훈련을 하는 것으로 그 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해나간다. 이러한 나라에는 태국 칠레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 이것이 GPR가 담고 있는 핵심 요지다.

GPR가 시행되면 주한미군 감축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의 이러한 전략 수정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협력적 자주국방 체제 구축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 놓인 난제는 협력적 자주국방안 하나로만 돌파하기에는 너무 커 보인다. 한 소식통은 지금의 미국을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전후의 미국과 비교했다.

“최근 미국은 7월1일 출범하는 이라크 임시정부가 요청할 경우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군을 재배치하고 규모를 줄이는 GPR를 검토하는 와중에 나온 철수 발언은 베트남전 와중인 1969년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괌독트린을 연상시킨다. 괌독트린 선언 직후 미국은 베트남에 파병돼 있던 미군을 철수시키고 이어 한국에서도 7사단을 철수시켰다(1971년 3월).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탕트 외교를 펼쳐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봉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소련이라는 큰 적을 고립시키는 ‘득(得)’을 얻기 위해 미국은 베트남이 포함된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는 ‘실(失)’을 감수한 것이다. 미국은 수년 후 실을 맛보고 20년 후에는 소련 붕괴라는 득을 만끽했다.”

GPR를 통해 미국이 새로운 국방전략을 준비하고 있는 데 대해 노대통령은 “미국과는 협력적 자주국방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만 언급했으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훨씬 더 다양하게 대응했다. 그는 미-중 데탕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남북조절위 회담과 남북 적십자회담을 열었고,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해서는 미 1군단에 한국군 장교를 투입해 한미 1군단으로 바꿔 지금의 한미연합사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공산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10월유신이라는 새로운 독재체제를 내놓았다.

이 시기 박정권은 1차 오일쇼크를 맞았으나 고속성장의 탄력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강화된 10월유신 체제를 이용해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박정권은 민주주의에서는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나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오일쇼크가 일어났음에도 안보와 경제 분야는 오히려 발전시켰다. 이 시기 한국이 고속성장을 거듭한 것은 베트남 파병이 큰 힘이 되었는데,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5000여명이 희생됐다.

이 소식통은 “시대가 바뀐 만큼 노무현 정부가 박정희 정부처럼 대응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자이툰 부대 파병 문제, 고유가 문제, GPR로 인한 미군 개혁과 그에 따른 한미동맹 문제, 경제위기 문제 등 박정희 시대와 비슷한 주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은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사석(捨石)’으로 고르고 대신 소련 봉쇄를 노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부는 경제와 안보를 살리기 위해 베트남 참전과 민주주의 희생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노대통령은 안보 변화에만 주목하지 말고, 이를 경제와 대북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연결시킨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간동아 437호 (p38~40)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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