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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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한국인들 ‘억울한 옥살이’

사업가 5명 영장도 없이 연행돼 1년 5개월째 수감 … 같은 상권 경쟁자인 유대인 음모설

  • 멕시코=한동엽 통신원 boracap@hanmail.net

    입력2004-05-06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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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의 한국인들 ‘억울한 옥살이’

    멕시코의 한 구치소 모습.

    2002년 12월5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중심가에서는 ‘호랑이작전’이라고 명명된 대규모 소탕작전이 있었다. 조직범죄, 마약, 총기류 등과 관련한 특수범죄를 다루는 검찰청 산하 특별수사대가 담당한 이 작전에 동원된 500여명의 무장경찰과 국세청 산하 수사대 등은 무자비한 압수와 연행을 감행했다. 문제는 작전 대상이 한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인들이 내보이는 통관 증명 서류나 회계장부 및 세금계산서 등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들이 이날 하루 동안 압수한 물량만 180t. 거의 무차별적인 압수라고 할 만했다. 나중에야 확인할 수 있었던 영장에는 ‘10일 안에 관련서류를 제출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체포영장은 없었으며 한인들에 대한 연행은 ‘현행범’이라는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연방검찰청장과 사회안전부 장관은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43명의 한국인 마피아를 체포했으며, 이와 관계한 36명의 멕시코인도 함께 연행했다”며 그 성과를 자랑했다. 현지 언론은 이후 연일 ‘한국인 마피아’에 대한 성토를 벌였다.

    그러나 멕시코 검찰의 기자회견 내용과 달리 당시 연행됐던 한인들은 관광객을 포함해 모두 33명이었으며, 함께 연행된 멕시코인들은 당일, 또는 이튿날 모두 무혐의로 석방됐다. 연행된 한인들은 최소한 4일 넘게 검찰청과 이민국에 억류되었지만 다행히 이들 가운데 19명이 무혐의로 풀려났고, 9명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나머지 5명만 정식으로 구속되어 1년 5개월째 멕시코 남부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이중 J씨는 최근 확정 판결을 받아 석방을 앞두고 있으며, 나머지 4명은 여전히 심리가 진행되고 있다. 구속 상태인 이들이 아직 확정 판결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들이 신속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셈이다.

    법원, 확정 판결 안 내린 채 차일피일



    5명의 수감자 가운데 S사 대표인 H씨는 1999년에 현지 의류공장을 설립하고, 3곳의 매장을 운영해 연 400만 달러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사업 규모가 컸던 만큼 피해 규모도 연행 당시 400만 달러, 그리고 현재까지 1000만 달러를 웃돈다.

    검찰이 H씨를 연행한 과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검찰이 H씨 공장을 급습했을 당시 200여명의 현지인이 일하고 있었다. 검찰은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를 받은 듯 이내 되돌아온 검찰은 막무가내로 공장의 제품을 압수하고 H씨를 연행했다. 이후 검찰은 H씨를 밀수, 돈세탁, 범죄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기소했고, 국세청도 10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상한 일은 법원이 현재까지 이에 대해 아무런 판결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H씨는 국세청을 고소했다. H씨는 또 검찰의 급습 당시 매장에 있던 상품이 현지 생산품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재판에서 최근 승소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총기를 들이대면서 매장에서 압수한 제품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공장의 제품이 밀수품이 아닌 멕시코산임을 입증하는 재판도 진행되고 있다.

    H씨가 연행될 당시만 해도 가족들은 H씨가 다른 한인들과 달리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곧 석방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담당판사가 ‘세무회계와 관련된 지식이 없다’며 검찰 측과 H씨 측, 그리고 판사가 선임한 전문감정사에게 세무자료에 대한 분석을 맡기면서 판결은 계속 늦춰졌다.

    H씨에 대한 재판이 더 늦어진 것은 H씨 공장에서 사용하던 수입 원단에 대한 법원의 성분검사. 담당판사는 2003년 7월까지 3차에 걸친 조사 결과에서 모두 ‘혐의 없음’을 통보받았지만, 또다시 성분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국립성분조사실에서 ‘일반적으로 원단에 대한 성분검사는 다소 유동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분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받았음에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6개월에 걸친 성분조사 결과 2%의 오차가 발견됐다. ‘먼지가 날 때까지 털었던’ 법원의 끈질긴 노력이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에 따라 법원 감정사는 H씨에게 2000페소(약 22만원), 함께 연행된 O씨에게 50만 페소(약 5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H씨의 처남인 이만복씨는 “원단의 성분 분석은 국가마다 그리고 조사 기관마다 오차가 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법원에 진정서를 제출해놓은 상태다.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유대계 음모론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의류업계의 상권을 잠식당하는 것을 우려한 유대인들이 사건을 주도했고, 시나리오는 국세청과 방송사의 고위직을 맡고 있는 유대인들이 짰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여기에 7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폭스 정부도 유대인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유대인들의 음모를 ‘방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폭스 정부는 ‘멕시코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정권 교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가시적인 개혁 성과’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인들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한인사회의 인식이었다. 그런 탓에 이씨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우려한다.

    정치적 입김 재판에 영향 줄까 ‘우려’

    “법원이 감정사나 우리 측 변호사의 주장을 무시하고 당초 국세청이 기소한 1000만 달러를 근거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최악의 결과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이 영장 없이 폭력적으로 시작됐으며, 단속 대상이 유독 한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재판 과정도 관례를 벗어나 무리하게 진행돼왔던 점 등에 비춰 이씨의 우려가 단순한 노파심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O씨가 받은 벌금을 멕시코식 실형으로 환산할 경우 약 2년의 징역형에 해당한다. 반면 H씨가 받은 2000페소는 며칠의 실형에 그치기 때문에 법원은 H씨의 석방 이후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국세청의 기소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더욱이 이것이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질 경우를 우려한 멕시코 정부와 법원이 H씨의 입을 막으려는 판결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일고 있다.

    최근 판결을 받은 J씨에게 30만 페소가량의 벌금이 부과됐다. J씨는 이를 기간으로 환산해 5월12일에 석방될 예정이지만 수감자 가족들은 법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한인사회 일각에서는 J씨의 석방을 시작으로 조만간 대부분 석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보석으로 석방된 한인들에 대한 재판도 2~3개월 안에 끝날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 때문에 판결이 불리하게 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7개월이 지나면서 구속자 가족들은 지쳐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싸늘해져버린 한인사회의 시선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한때는 수감된 한인들한테서 제품을 받아 판매했던 협력업체들도 이제는 ‘나 몰라라’ 하며 등을 돌린 지 오래며, ‘한인 마피아 일제 소탕’이라는 멕시코 언론의 왜곡된 기사가 여과 없이 번역돼 한국에 보도됐을 때 함께 분노했던 한인들도 ‘죄가 있으니까 잡혀 있겠지’라며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꼭 재판에 이겨서 공장도 다시 열고 직원들도 다시 불러들이고, 우리에게 등을 돌렸던 한인들에게 보란 듯이 재기하고 싶다”는 한 수감자의 말에서 그간의 힘겨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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