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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이주노동자 ① | 필리핀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국민 10명 중 1명꼴 해외취업 … 임금·고용조건 좋은 한국 인기 ‘무르익는 코리안드림’

  • 글·사진/마닐라=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한국언론재단 지원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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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 대낮에도 거리에서 소일하고 있는 필리핀 젊은이들.

필리핀 마닐라의 나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OFW(Overseas Filipino Workers·해외취업 필리핀 노동자)를 위한 전용 입국 수속대였다. 국제공항 입국장의 일반적인 풍경은 자국민용과 외국인용으로 구별돼 있는 창구. 하지만 필리핀은 자국민들 중에서도 해외 취업자에게만 전용 수속대를 제공할 만큼 이들을 특별 대우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대의 인력 송출국 필리핀에 왔음을 말없이 웅변하는 장면이다.

필리핀은 올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우리나라의 ‘외국인 고용허가제’에 가장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전체 국민 8000만명 가운데 10분의 1에 해당하는 740만명이 해외취업 중일 정도로(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펴낸 ‘2003년 통계핸드북’) 인력 송출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외화 수입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취업자를 애국자로 여기는 필리핀에서 OFW들은 갖가지 특혜를 받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의 수화물 벨트에 도착하자 정사각형 모양의 상자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필리핀 현지어인 타갈로그어로 ‘발리바인(Balikbayan)’이라 불리는 OFW들이 챙겨온 짐들이다. 필리핀 정부는 이들에게 가로, 세로, 높이 각각 1m 크기의 상자 한 개만큼의 면세품 반입 권리를 주는데, 그 상자가 더미를 이룰 만큼 많았던 것이다. OFW들은 입국 후 48시간 동안 미화 1000달러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면세점 쇼핑을 할 수도 있다. 전자제품 등 고급 소비재를 대부분 수입하는 필리핀 현실에서 OFW들이 이 권리를 이용해 벌어들일 이득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실업률 11% … 정부 해외취업 적극 장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한국의 60·70년대를 연상케 하는 필리핀 주택가와 한국행 비자를 받으려는 필리핀인들로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주(駐)필리핀 한국 대사관 풍경(위부터).

이처럼 적극적인 해외취업 장려 정책으로 필리핀 정부가 얻는 것은 세계 제1의 인력 수출국이라는 명성과 외화 수입. 매분기마다 OFW가 자국에 송금하는 금액을 결산, 발표하는 필리핀 중앙은행(BSP) 부에나벤추라 총재는 “OFW들이 매년 본국에 송금하는 외화는 미화 60여억 달러로, 2002년 필리핀 국내 총생산(GDP)의 10.8%를 차지하는 규모”라며 “이들의 송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페소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한다”고 답했다.

현지에서 마주친 필리핀인들의 삶도 이들이 왜 해외로 나가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2004년 1월 현재 실업률이 11%에 이르고, 불완전 고용률은 17.5%인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거리 곳곳에서는 한 뼘의 그늘이라도 있으면 기어이 들어가 낮잠을 청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1994년부터 한국에서 일하다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필리핀으로 돌아왔다는 마닐라 파빌리온 호텔의 운전기사 안토니오 트리나다드씨(35)는 “한국 젊은이들은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든 다른 곳에 취직하기 위해 애쓰지만 필리핀 젊은이들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만성적인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긴다면 모를까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필리핀 국립대학 정치학과 미리암 페러 교수도 “필리핀은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고, 농업 인구도 35%에 이른다”며 “제조업 등 기초산업이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취업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취업할 직장이 없어 놀고 있는 실업자들이 많은 상태”라고 말했다.

전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탓에 피임이 죄악시된다는 점도 극심한 취업난의 한 원인이다. 페러 교수는 “일반 가정의 경우 자녀가 4~5명에 이르는 경우가 보통이라 정부가 해외취업을 적극 장려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고, 그 때문에 국내 산업은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취업과 해외 취업 사이의 막대한 임금 격차도 필리핀인들의 외국행을 부추긴다. 필리핀 국적 항공사인 필리핀 에어라인에 근무하다 99년 한국에 취업한 발 싱코씨는 “필리핀 에어라인에서는 매달 200달러(약 24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한국 공장은 첫 달 월급으로 그보다 세 배가량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며 “항공사보다 훨씬 노동 강도가 센 프레스 공장에서 일했지만 워낙 급여 차이가 커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한국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3개가 잘린 발 싱코씨와 한국 공장에서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 제인 클라우드씨, 안토니오 트리나다드씨 (왼쪽부터).

하지만 높은 월급을 보장받고 국내에서 ‘애국자’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OFW들의 삶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현지인들과 다른 피부색, 서툰 현지어로 인해 노동 현장에서 끊임없이 차별받고 내국인보다 훨씬 열악한 고용 환경에서 갖가지 산업재해에 시달려야 하는 게 해외취업 필리핀 노동자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들어온 싱코씨에게도 우리나라의 첫인상은 악몽이었다. 입국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프레스기에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취업 비자가 없었던 그는 부상 후에도 가족을 한국으로 불러들일 수 없었고, 낯선 외국에서 넉 달 동안 홀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 사고로 싱코씨의 왼손에는 엄지와 검지만 남았다.

하지만 싱코씨는 “그래도 한국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었다”고 말한다. 월급을 받지는 못했지만, 외국인 노동자 인권운동을 하는 한 목사의 도움 덕에 보상금 400만원을 받을 수 있었고, 치료비도 사장이 모두 부담했기 때문이다. 싱코씨는 그 돈으로 아내와 아들을 다시 한국에 보냈고, 그들이 송금한 돈으로 필리핀에 사는 두 딸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그의 딸들은 지금 필리핀에서 각각 고등학교와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상태. 싱코씨는 기회만 된다면 이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 한국과 필리핀의 임금 격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자국과 임금 3배 차 … ‘황금의 땅’ 인식

필리핀인들이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 최소한의 생활비는 마닐라 수도권 평균이 한 달에 1만 5000페소(약 30만원), 변두리 지역인 민다나오는 7000페소(약 14만원) 수준(2004년 3월 필리핀 사회생활연구소 설문조사 결과)이다. 필리핀의 평균적인 가족 구성원 수가 6~7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낮은 액수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 80만~90만원의 월 수입을 약속하는 해외취업은 필리핀인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필리핀인들은 3D 업종이라도,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산업연수생이라도, 산재 위협이 아무리 클지라도 일단 해외에 취업하고 싶어한다.

필리핀에서 14년째 체류 중인 교포 전무복씨는 “필리핀에서 최근 반한 감정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설명했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필리핀의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 5월10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필리핀 거리 곳곳에는 선거용 포스터가 붙어 있다(왼쪽). 정치 불안은 필리핀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재나 고용주의 폭행, 폭언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린다. 하지만 필리핀 노동자들의 관심은 노동 환경보다 임금과 불법 체류 가능성이다. 한국은 ‘TNT’가 쉽고 일본, 대만에 뒤지지 않는 높은 임금을 준다는 소문이 퍼져 필리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TNT’는 타갈로그어로 ‘불법 체류’를 뜻하는 말로 ‘숨고 또 숨는다’는 단어의 첫머리를 딴 것. 한국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한 20대 필리핀인은 “한국인들은 인정이 많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 TNT에 유리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7년간 일하다 올 2월 필리핀으로 돌아온 제인 클라우드씨(29)도 “한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지만, 아이가 병에 걸리자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발벗고 도와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내가 귀국한 뒤에도 아들을 위해 약을 보내주는 등 끝없는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근무하던 회사의 사장 가운데에는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며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폭행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법체류자에게 관대한 문화와 친절한 한국인들 덕에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닐라 주재 한국 대사관의 김종민 영사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불법체류자 고용을 탈세로 취급해 엄중 단속한다. 스페인의 경우 불법체류자 고용 사실이 드러나면 공장을 몰수할 정도다. 반면 한국은 불법체류자 단속을 반인권적인 행위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생활하기에 오히려 편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마닐라 중심가에서 승용차로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만달루용시 슬럼가에서 만난 주민들도 한결같이 ‘한국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건축업을 하는 에덴 판가니반씨(32)는 “남편의 수입은 하루 150페소(약 3000원) 정도로, 네 식구가 살기에 너무 부족하다. 한국에 가서 일할 수만 있다면 공장 노동자든, 가정부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마닐라 거리 곳곳에는 대낮부터 그늘을 찾아 잠을 청하고 있는 실업자들이 많다.

동생과 조카가 이미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에프렌 솔리토씨(46)도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인을 미워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동생이 돈만 보내주면 나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의 한국행을 어렵게 하는 것은 최소 1500달러에 이르는 에이전시 수수료다. 여권과 비자 발행 등을 대행해주는 브로커들이 해외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상대로 막대한 수수료를 받아내기 때문. 다른 집의 빨래와 다림질 등을 해주고 받는 월 100달러의 수입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마리윅 듀로판씨(34)는 “한국에 가려면 최소 1500달러에서 2000달러(약 180만~240만원)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내 형편으로는 도저히 마련할 수도, 빌릴 수도 없는 돈”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정도 액수는 일단 해외취업에 성공하면 단시간에 갚을 수 있는 수준이라 필리핀인들은 돈을 꾸어서라도 외국행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리핀 현지에서 취업 및 국제결혼 사기는 살인, 강간에 버금가는 중죄로 여겨지고 있다. 필리핀 한인회장 장재중씨는 “필리핀에서는 해외취업업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필리핀인에게 돈을 받고 취업을 시켜주거나 시도하는 행위를 하면 최고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도입한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이 같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노동부와 필리핀 노동부 내의 해외고용청(POEA)이 인력 수출입의 창구로 직접 나서기 때문에 에이전시의 개입이 근본적으로 차단된다는 것. 필리핀 해외고용청의 로잘린다 발도츠 청장은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 한국 노동부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노동자들을 필리핀 정부 기관인 POEA가 선발해 보내기 때문에 브로커의 비리 문제가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며 일단 환영의 뜻을 밝혔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에프렌 솔리토씨, 에덴 판가니반씨, 마리윅 듀로판씨(왼쪽부터).

하지만 필리핀 내에서는 우리의 고용허가제가 현재 있는 노동자들을 일단 추방하고 새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돼 있어 인권 침해 우려가 높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산업연수생제가 병존하게 됨으로써 이로 인한 노동기본권 침해는 여전할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필리핀 노동연구소의 마리아 사무총장은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노동 상황에 대해 필리핀인들이 침묵하는 것은 거기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필리핀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며 “노동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산업연수생제를 폐지하고, 현재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고용허가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박천응 소장도 “60, 70년대에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은 독일에 건너가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들이 100달러 안팎의 월급을 받아 한국에 송금한 미화가 당시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을 정도”라며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우리가 인력 수입국이 됐다 해도, 외화를 벌기 위해 고생했던 옛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필리핀의 노동자들은 한국의 고용허가제 도입 이후 한국 내 고용 환경과 진입 장벽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주간동아 434호 (p56~59)

글·사진/마닐라=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한국언론재단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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