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2004.04.01

삼형제 넋 꽃과 구슬로 변신했구나

원수 과양상이 몸으로 가 똑같이 복수 … 우리 인생 욕망 허깨비 놀음 통렬히 지적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4-03-26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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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형제 넋 꽃과 구슬로 변신했구나

    지옥에서 도깨비들이 죄인을 고문하고 있다.



    우리 신녀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천당도 극락도 없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로 인간 세상을 말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근심 수심 없이 사는 게 극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불평등하고 도적이 많다. 누구나 잘 먹고 잘 입고 근심 수심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하다. 저승법은 맑고 깨끗하지만, 이승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은’은 ‘거슬러 오르는’이라는 말이다. 울며불며 따르는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갈지라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 저승길,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이 저승길은 ‘거슬러 오르는 물, 거슬러 오르는 다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저승길을 도저히 갈 수 없는 귀신도 있다. 한 많고 설움 많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귀신이다.

    우리 범을황제의 아들 삼형제가 바로 그렇다. 열다섯 십오세의 고개를 넘으려고 세상 공부를 다니던 삼형제는 어이없이 덧없는 죽음을 당하였다. 이팔청춘 꿈같은 시절을 눈앞에 두고 그 시체까지 돌에 묶여 까치못에 던져졌으니, 죽어서도 어미 아비를 한번 만나지도 못하고 어찌 발걸음이 떨어질까?

    이 원수를 어찌할까?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서야 어찌 맑고 깨끗한 저승으로 갈 수 있을까?

    삼색 꽃 세 송이와 오색 구슬 세 개



    아니, 삼형제의 넋이 과양상이 죄를 묻기 위해 꽃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바스스 타버리다니!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아쉬워할밖에!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자, 이야기를 더 따라가 보자.



    과거 깃발이 둥둥 떴구나

    삼형제 넋 꽃과 구슬로 변신했구나

    꼬챙이로 사람에게 벌주는 도깨비.

    삼형제가 죽어 그 넋이 꽃으로 환생하고, 그 꽃이 다시 구슬로 변신한다. 과양상이가 그 구슬을 꿀꺽! 했다. 말하자면 삼형제의 넋이 과양상이 몸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과양상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대충 짐작하는 독자도 있을 줄 안다.

    이 궁금증을 풀기 전에 ‘구슬’ 이야기를 잠깐 한다. 구슬은 우리 옛 이야기에서 여의주를 말한다. 보통 ‘푸른 구슬’, ‘파란 구슬’, ‘황금 구슬’로 나온다. 이것은 뜻한 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는 주술을 부린다.

    여기서의 구슬은 주술을 부리기는 하지만, 여의주는 아니다. 꽃의 변신이다. 꽃은 암수의 생식기를 갖추고 있는 ‘생명’의 상징이다. 우리 신화의 서천꽃밭에 있는 꽃들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능력의 결과물이 열매 아닌가?

    과양상이가 먹어버린 구슬은 곧 꽃이 맺은 열매를 상징한다. 그런데 열매는 곧 씨앗이다. 씨앗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예고한다.



    욕 한번 섬뜩하구나. 그게 자기가 낳은 자식인 줄도 모르고 표독스럽게 “모가지나 부러져라”라고 저주를 해대는 과양상이 꼴이라니. 남의 자식들에게 저주를 퍼부어놓고 어찌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까? 그런데 이 과양상이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과양상이의 속을 뒤집어놓은 과양 삼형제의 시체가 죽은 지 오래된 송장이라고? 여기서 과양상이의 속만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야기도 뒤집어진다. 오래된 송장은 바로 범을황제 아들 삼형제의 송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을 삼형제가 꽃으로 환생하여 다시 재가 되었다가 구슬로 맺혀 과양상이의 아들로 또다시 환생하여 과양상이 눈앞에서 죽어버린, 이 모든 환생과 죽음의 과정이 허깨비였다는 말이 아닌가? 과양상이가 꽃을 본 것도 구슬을 놀리다가 먹은 것도 환상이고, 아이를 밴 배도 헛배이며 산통을 느끼고 아이를 낳아 길러 과거를 띄우고 돌아와서 죽은 모습을 본 것도 다 허깨비 놀음이었다는 대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이다.

    우리 인생도 한바탕의 꿈과 놀이인데, 꿈속의 꿈이요, 놀이 속의 놀이인 환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욱더 기가 막히는 이야기는 과양상이의 눈에 허깨비가 씌었다는 사실이다. 과양상이는 아직도 진실을 볼 수 없다. 욕망이라는 허깨비 놀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팬터지 속 팬터지의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과양상이의 소장



    자, 김치원은 과양상이의 소장을 어떻게 해결할까? 다음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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