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황장엽 살해협박 누구 짓일까

수사당국, 남파공작원·황씨 반대 국내 단체에 혐의 … 지문 발견된 여대생은 용의점 없어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3-18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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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엽 살해협박 누구 짓일까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와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 두 사람은 함께 망명했으나 2002년 김씨가 황씨와 노선 차이로 결별을 선언했다.

    ‘민족반역자 황장엽은 각오하라.’

    3월8일 오전 9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 탈북자동지회 사무실에 소름 끼치는 협박물이 배달됐다. 닫혀진 출입문 앞에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를 살해하겠다는 내용의 괴유인물이 놓여 있었던 것. 붉은색 물감이 흩뿌려진 황씨의 얼굴 사진 위에는 30cm 길이의 식칼이 이마를 관통해 꽂혀 있었다. 또 황씨의 방일행각을 저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A4용지 반 크기의 유인물 10여장이 사진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영정 크기의 사진 밑에는 ‘김덕홍 고영환 죽여버리겠다’는 문구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경찰과 보안당국은 황씨에 대한 경호를 강화하는 한편, 테러를 감행하려 한 단체나 사람이 누구인지 수사에 나섰다.

    협박 유인물에 북한식 표현 많아

    누가 황장엽을 위협하는가. 또 왜 그를 위협하려 하는가. 황씨는 이미 여러 차례 신변 위협을 받아왔다. 지난해 10월 방미를 앞두고 한총련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방미 저지결사대가 결성된 것은 물론 2월16일 김정일 생일이나 4월15일 김일성 생일을 맞아 황씨를 암살하겠다는 첩보가 보안당국에 접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섬뜩한 협박성 유인물이 공개적으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수사당국이 혐의를 두는 세력은 크게 두 부류다. 북한에서 ‘황장엽 제거 임무’를 받고 내려온 남파공작원, 또는 황씨의 활동에 반대하는 국내단체라는 것.



    황씨의 발언과 행동은 대북관계와 국제정세 흐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다양한 세력이 국내외에 존재한다. 한 북한전문가는“미국 등 해외에서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황씨의 행동은 북한에 눈엣가시다. 황씨가 곧 일본 국회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3월6일자 일본 니혼 게이자이 신문의 보도가 북한을 더욱 위축시켰을 것”이라 지적했다. 특히 황씨의 일본 방문은 미국 방문에 비해 북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납치 문제 등 민감한 현안이 걸려 있기 때문. 일본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으며 북한을 겨냥한 특정 선박 입항 금지법안의 제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황씨의 일본 방문은 그렇지 않아도 북한을 꺼리는 일본의 우경화에 불을 당길 게 자명하다. 따라서 북한의 경제 위기와 고립을 두려워하는 북한 내부세력이나 대북관계 악화를 염려하는 국내단체가 이번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 사이에서도 황씨에 대한 생각은 엇갈린다. 황씨는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인 동시에 탈북자단체연합회 대표로 활동하면서 북한 인권문제의 해결과 북한 민주화를 강력히 주장하며 국내 보수시민단체와 연대해왔다. 탈북자들 역시 대부분 체제에 염증을 느껴 북한을 탈출한 만큼 ‘반북’ ‘반(反) 김정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대북정책에서만큼은 시각차가 존재한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햇볕정책’은 이들의 입장차를 가늠하는 대표적 잣대다. 황씨의 한 측근은“황씨가 햇볕정책 이후 자신의 대북 발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데 대해 갑갑함을 호소해왔다”고 전했다. 반면 DJ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탈북자 K씨는“황씨가 북한의 인권 문제 해결을 대내외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장세동씨가 5공 세력 청산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며 반감을 드러냈다. 북한의 인권 탄압 근거를 마련한 장본인이 그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고 남한에서 온갖 대접을 받으며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녕 협박을 감행한 세력은 어딜까. 경찰은 국가정보원, 기무사와 함께 합동신문조를 구성해 조사를 벌이고 있으나 범인 검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3월9일 유인물에서 발견된 지문을 바탕으로 여대생 이모양(20)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용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서울 소재 K대에 재학하고 있는 이씨는“황씨의 얼굴도 잘 모를 뿐더러 학생운동에 가담한 적도 없다”며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이양이 대자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협박 유인물로 사용된 종이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K대학과 관련이 있는 운동권 학생을 대상으로 수사를 펴고 있다.

    황장엽 살해협박 누구 짓일까

    고영환 전 콩고 북한대사관 1등서기관

    이와 함께 일부 언론은 협박 유인물에 ‘망발을 줴쳐대다(씨부렁거리다)’ ‘인내성이 한계에 다다랐다’ ‘황장엽 역도는 이북의 사랑과 믿음에 배신과 변절로 대답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 마리 미친 개처럼 반북모략에 날뛰고 있다’ 등의 북한식 표현이 많은 점을 들어 대북 용의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남한 사람이 구사하기 어려운 표현과 어휘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북한 사람이 직접 작성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러나 북한전문가인 김영수 교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는“북한 사람이 유인물을 작성했다면 ‘이북’이란 표현 대신 ‘조국’이란 말을 썼을 것”이라며“유인물의 작성자는 북한식 말투를 상당히 학습하고 흉내냈을 뿐, 이 유인물이 북한에서 작성된 것 같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또 범인이 황씨를 제거할 의지가 있었다고 보기엔 협박 방식이 허술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1997년 2월 황씨 망명 직후 북한은 황씨 처단을 단언했고, 그를 암살할 임무를 지닌 특수부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범인이 ‘황씨 살해’를 목표로 한 남파공작원이었다면 단순히 협박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송파경찰서의 수사 관계자는“1997년 김정일 처이질 이한영씨 피살사건 때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용의자가 남파공작원이었다면 황씨를 소리 소문 없이 살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일 계획은 물론 국내 일정도 당분간 연기

    협박 유인물에 김덕홍, 고영환씨의 이름이 거론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황씨와 달리 황씨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이나 1991년 망명해 현재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고영환 전 콩고 북한대사관 1등서기관은 최근 대외활동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김씨는 2002년 노선갈등으로 망명 생활 5년여 만에 황씨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런 맥락에서 두 사람을 함께 테러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반응이다. 고씨 역시“황씨와 함께 살해 대상으로 거론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북한 고위층의 핵심 정보에 근접해 있는 사람들이란 것. 한 대북전문가는“대남 방송을 들으며 김씨와 고씨의 이름에 익숙해진 남한의 좌파 대학생이 관념적으로 이들의 이름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고씨도“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 세력이 협박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친북성향의 학생단체가 자발적으로 협박을 감행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범인은 설사 황씨를 살해할 계획이 없었다 해도 일단 테러 위협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황씨가 일본 방문 계획은 물론 한국에서의 비공식 강연 일정을 당분간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해 위협 소식을 전해 들은 황씨는 3월13일 탈북자동지회 창립5주년 모임에 나타나 “우리는 협박에 굴복할 수 없다”며 탈북자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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