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6

2004.03.18

시청 앞 잔디광장 페스티벌용?

‘빛의 광장’ 당선작 폐기 잔디로 졸속 추진 … 준비된 광장 아닌 ‘그들의 그들만을 위한 광장’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4-03-11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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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 앞 잔디광장 페스티벌용?

    2월29일부터 시청 앞 광장 조성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장(왼쪽). ‘Hi 서울’ 스티커를 나눠주고 있는 이명박 서울시장(오른쪽 위 가운데). 시청 앞 주변 도로는 바뀐 신호체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차들로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

    ”서울시청이 아니라 서울특별건설회사인가 보죠? 사대문 안을 다 헤집어놓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요.” “서울시청 앞 광장 조성에는 찬성하지만, 공지 1주일 만에 공사에 들어가다니…. 시민 여론을 듣긴 하나요?”

    서울시민과 택시기사들의 성난 목소리다. 시청 앞 광장 조성사업으로 서울시청 앞 교통 흐름이 완전히 바뀐 3월2일, 서울시민들은 미아고가 철거 및 청계천 복원공사 여파로 가뜩이나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심 교통체증을 가중시킨 서울시의 무리한 시책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시청 앞은 갈 방향을 잃은 차들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서울시는 2월24일 광장 조성공사를 발표한 뒤 사흘 만에 40년 된 시청 앞 분수대를 철거했다. 건설회사에서 단련된 이명박 서울시장 특유의 속도감각은 일요일인 2월29일, 4400평의 광장 부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오후 5시부터 교통체계를 완전히 바꿈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단 50여일 만에 공사를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친 행보였지만, 시청 앞은 출근 시간대에 시간당 1만5000대의 차가 통과하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 요지인 데다 홍보기간이 턱없이 짧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시장에게는 다행스럽게 교통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는 운전자들이 정체구간을 피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출입기자들도 “이시장은 운이 좋은 것 같다”는 말로 청계천 복원사업과 뉴타운 건설에 이은 그의 세 번째 공적을 ‘축하’했다.



    그러나 시청 앞 광장 조성을 꾸준히 주장해온 시민단체나 관련 전문가들은 시청 광장이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보여준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반복함으로써 시민들을 농락했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과연 시민단체가 먼저 깃발을 들고, 이시장이 총대를 매고 나선 시청 앞 광장 조성사업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서울시는 이 광장에 잔디를 깔기로 하고 대대적인 명칭공모에 들어갔다.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같은 파란 잔디가 회색빛 서울에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는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잔디광장 추진은 시민단체뿐 아니라 광장사업을 총괄하는 ‘시청앞 광장 조성위원회’(이하 조성위원회) 위원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어느 수도의 중심 광장에 잔디가 깔려 있습디까? 한마디로 난센스입니다.”(강병기 조성위원장)

    시청 앞 잔디광장 페스티벌용?

    서울시가 다시 설계한 ‘잔디광장’ 완공 예상도(위)와 한양대 서현 교수가 설계한 당선작 ‘빛의 광장’.

    조성위원회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공사를 추진하겠다는 이시장의 공약에 따라 만들어졌다. 시 조례에 근거한 엄연한 심의 및 자문기구이지만 막상 공사가 시작되면서 조성위원회는 모든 권한을 서울시에 빼앗기고 단순 자문기구로 떨어지고 말았다. 위원들은 ‘잔디 논쟁’을 서울시가 묵살하자 자신들의 역할이 “이시장의 밀어붙이기식 개발에 면피를 제공해주는 꼴이다”며 한탄하고 있다.

    시청 앞 광장 논의를 주도해온 최정한 도시연대 전임 사무총장은 “수만명이 운집하는 시청 광장에 잔디가 깔린다면 잔디보호가 시민들의 참여를 막는 빌미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잔디’와 ‘광장’은 대치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잔디를 깔지만 바라보는 광장이 아니라 시민들의 쉼터, 즉 시민공원의 역할까지 겸할 수 있도록 꾸미겠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가 잔디광장을 굳이 고집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시는 2002년 ‘붉은 악마’에 의해 시청 앞 광장이 세계적인 명소로 떠오르자 광장 추진을 위해 2002년 말 대대적인 설계공모를 단행했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서울시는 한양대 건축학과 서현 교수가 출품한 ‘빛의 광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빛의 광장’의 주요 설계 내용은 바닥에 TFT-LCD 모니터 2000여개를 깔고 그 위를 고강도 유리로 덮는 방식. 2000여개의 모니터를 통해 개인의견 표출은 물론 비디오 아트 등 설치미술로도 활용이 가능해, 그 자체로 미적 효과와 함께 한국 IT기술의 성과를 세계에 알리는 혁신적인 설계였다. 많은 건축가들은 “이 작품이 대한민국의 중심인 시청 광장을 파리 에펠탑에 버금갈 만한 상징예술로 승격시킬 것이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난해 중반부터 ‘비현실적인 개념의 광장인 데다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빛의 광장’을 광장 조성안으로 채택하지 않을 뜻을 내비치다 결국 올해 초 ‘무기 연기’를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당선작을 폐기했다.

    완공된 이후 비판 수용 배짱 시민 목소리 외면

    서교수는 시청 앞 광장 설계에 10년 가까이 매달리면서 광장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까지 다각도로 연구해온 전문가. 게다가 조성위원회 위원들도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돼 적잖은 보조추진기획을 제시했지만 서울시는 2월24일, 경찰청의 승인을 얻어 서둘러 잔디광장 조성안으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잔디광장 설계를 설계 전문회사가 아닌 서울시 건설안전본부가 직접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최고위층에서 잔디광장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사태가 이렇게 진행됐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시 한 공무원은 “행사용 광장이 필요한 서울시에서 집회장소나 여타 불순한 의도로 광장이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잔디에 과도하게 집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군사정부가 광장이 집회나 시위에 이용될 것을 두려워해 광장을 없앤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장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인 상황에서 서울시가 다급하게 시청 앞 광장을 추진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시청 광장은 전임 고건 시장 때부터 연구돼왔습니다. 지난해 9월 착공이 목표였지만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해 연기된 사항입니다. 서두르거나 급조된 공사가 결코 아닙니다.”(서울시 도로계획과장)

    서울시 고위 관계자들은 잔디광장 조성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행정이란 고도의 기획력과 강한 추진력이 우선되기 때문에 모든 비판은 완공된 이후에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는 그리고 시청 앞 광장을 5월7일 열리는 ‘하이(Hi)서울 페스티벌’에 적절히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시장은 평소 부산시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켜 세계적인 도시로 급부상하고 안상영 당시 부산시장의 주가도 덩달아 오른 사례를 적잖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결국 “서울에 세계적인 페스티벌이 있어야 한다”는 이시장의 강한 의지는 하이서울 페스티벌로 나타났다.

    이미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때문에 시청 광장 공사가 앞당겨졌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결국 서울시장이 ‘걷기 좋은 도시’ ‘역사 복원’ ‘대한민국 중심광장’이라는 역사적 소임 대신에 하이서울 페스티벌용으로 시청 앞 광장 조성을 급조하려 했기 때문에 여러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문화관련 시민단체들은 이미 “시민의 뜻을 무시하고 잔디 덮인 조악한 광장을 추진할 경우 재공사가 불가피해 시민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문제는 서울시의 의사결정 구조가 이 같은 의견조율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비민주적이라는 사실이다. 각종 토목사업과 관련해 “공무원들이 이시장과 몇몇 측근들의 취향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지적이 시청 주변에 나돈 지 오래다.

    의욕에 넘치는 이시장이 결정한 잔디광장이 불과 몇 년 뒤 자신이 철거한 ‘청계고가도로’ 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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