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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명동 사채시장

4월 국민주택채권 ‘등록발행’으로 전환 … 4천억대(?) 돈줄 차단 엄청난 타격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엎친 데 덮친 명동 사채시장

엎친 데 덮친 명동 사채시장

전국 사채시장의 60~80%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 골목.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 주택국 관계자는 최근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건교부 정책에 반대하는 서울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 주택국 관계자는 “보통의 경우라면 머리띠를 두른 채 목소리부터 높였을 텐데 점잖게 변호사를 선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면서 웃어넘겼다.

사채시장에 비상이 걸린 이유는 건교부가 4월부터 국민주택채권 발행 방식을 채권 실물을 직접 교부하는 ‘실물발행’에서 ‘등록발행’으로 바꾸기로 방침을 정했기 때문. 등록발행이란 채권 발행시 채권 실물을 발행하지 않고 매입자의 성명, 매입금액 등 채권의 내용을 증권예탁원에 등록함으로써 채권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는 제도. 이에 따라 사채시장이 설 자리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국민주택채권은 서민주택 건설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민주택기금의 부담으로 발행되는 국채(5년 만기, 연리 3%)로, 부동산 등기·저당권 설정 등의 경우에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한다. 연간 발행 규모는 약 7조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민주택채권을 매입하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지 않고 바로 현금화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건교부 추산에 따르면 전채 발행액의 80% 정도가 채권 브로커들에게 18% 정도의 할인율로 매각된다.

만기물량 이외 은행서 즉시 매도

채권 브로커들이 매집한 채권은 최종적으로 명동 사채시장 전주(錢主)들에게 흘러간다. 이들 전주들은 수십억원 단위가 되면 은행이나 증권회사에 매각한다. 이 경우 공정할인율 12%를 적용받기 때문에 앉아서 6%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이 가운데 3% 안팎은 채권 브로커들 몫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상황에서 불과 며칠 만에 3% 안팎의 수익률을 올린다면 대단한 재테크 실적이다.



건교부는 채권 브로커들과 전주들이 국민주택채권 할인을 통해 얻는 이익이 연간 4000억원 정도라고 보고 있다. 결국 그만큼 국민 부담이 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등록발행이 이뤄지면 만기까지 보유하는 물량 외에는 모두 은행 창구를 통해 즉시 매도가 이뤄진다. 명동 사채시장으로선 엄청난 타격인 셈이다.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들이 “제도 자체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시행 시기를 늦춰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들이 국민주택채권의 등록발행을 반대하는 이유는 또 있다. 등록발행이란 곧 ‘무기명 채권의 기명화’를 의미한다. 건교부 관계자는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결과 국민주택채권이 돈세탁 수단으로 악용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등록발행으로 바뀌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등록발행은 결과적으로 금융시장 투명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명동 사채시장

3월3일 불법 대선자금 제공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공개 소환되고 있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큰 사진). 국민주택채권 실물.

명동 사채시장의 전주 K씨는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특검의 대북 송금의혹 사건과 검찰의 현대 비자금 150억원 수사 때 이곳 명동 ‘큰손’들이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은 데다 올해 들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씨의 괴자금과 삼성그룹이 한나라당에 건넨 채권에 대해서도 검찰이 추적에 나서 명동 사채시장이 얼어붙었는데, 이제는 건교부까지 목을 조이고 있다”고 푸념했다. 명동 사채시장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인 셈이다.

10년간 명동 사채시장을 지켜왔다는 한 브로커는 “최근 검찰이 수년 전에 거래된 내역까지 훑고 다닌다는 말에 이 사업을 접겠다는 전주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앞의 K씨 역시 마찬가지다. K씨는 “사채시장 쪽보다 부동산 개발 쪽이 훨씬 더 구미를 당긴다”면서 “최근 들어 20% 이상의 수익을 보장하겠다면서 개발 부지 매입자금을 대달라고 요청하는 개발업자들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명동 사채시장의 썰렁한 분위기는 현장을 둘러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3월4일 오후 명동의 전국은행회관 맞은편 골목길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채권 브로커 L씨는 “요즘은 채권이 아니라 상품권 정도만 거래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쫛쫛상사’라는 상호의 명함 수십 장을 보여주며 “얼마 전까지 거래하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연락조차 안 된다”고 했다. ‘카드깡’이나 음성적인 ‘고리대금업’을 하던 사람들이 명동을 떠났다는 것이다.

최근 명동 사채시장의 관심사는 검찰이 최근 발견한 300억원대 뭉치 채권의 행방. 검찰은 현재 이 채권의 일련번호를 확보, 이 채권 매매를 중개한 브로커들을 상대로 이 뭉치 채권이 어디로 흘러갔고, 현재 누가 갖고 있는지 등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통상 거래 규모가 큰 채권 매매의 경우 채권 브로커들이 채권을 사간 사람에 관해 메모를 해놓기 때문에 이를 단서로 추적하면 된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로 바짝 위축 ‘썰렁’

검찰은 이미 300억원대 뭉치 채권의 흐름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앞으로 상당 기간 써먹을 수 있는 자료를 이미 확보해놓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검찰은 공식적으로 “채권 뭉치가 움직인 사실을 발견한 것은 맞지만 그 채권이 어디와 관련 있는지는 아직 확인된 게 없다. 그러나 대선 훨씬 전인 2001년에 움직인 것이어서 대선자금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 뭉치 채권이 삼성 비자금이어서 검찰이 신중한 행보를 보이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검찰은 “이 채권을 삼성 것이라고 특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일 수도 있고…”라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들은 검찰이 사채시장을 뒤져 삼성이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으로 채권을 제공한 사실을 밝혀내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무엇보다 검찰의 수사 능력이 일취월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서울지검의 한 특수통 검사는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회사 장부는 그 회사 관계자들을 불러 조사하면서 머리를 툭툭 치는 데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그 장부를 직접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검찰의 실력이 늘었다”고 말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명동 사채시장 규모가 축소돼왔던 점도 검찰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앞서의 K씨도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 상황이었다면 검찰도 삼성이 한나라당에 제공한 채권을 밝혀내지 못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명동 사채시장 규모가 컸던 만큼 이곳에서 돈세탁을 거치면 아무리 검찰이라도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검찰은 현재 명동 사채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이 3~4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1994년 약 34조원(당시 국민총생산의 11.2%)이 조달되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당시 국내 총통화량의 26%가 명동 ‘지하금고’를 통해 유통됐다고 추정했다. 명동은 전국 사채시장의 60~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지하자금의 실제 규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번 검찰 수사가 결과적으로 검은돈의 유통망을 상당 부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것이다. 검은돈은 속성상 검찰이 한번 뒤진 루트는 절대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친 ‘불행’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주간동아 426호 (p50~51)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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