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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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탈입망 선승 불꽃 피안에 가다

굵은 눈발 속 백양사 방장 서 옹 스님 다비 거행 … 학처럼 수행과 구도 ‘참사람 운동’ 설파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12-24 1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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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탈입망 선승 불꽃 피안에 가다

    눈보라가 치는 차가운 날씨에도 전국에서 3만여명의 불자가 서옹스님 다비식을 찾았다.온화한 웃음과 말씀으로 뭇 사람들을 감화시킨 생전의 서옹스님(작은 사진).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다비식(茶毘式)이 있던 12월19일, 전남 장성군 백양사 계곡에는 종일 굵은 눈발이 흩날려 대표적인 선승의 입적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영하의 차가운 날씨였지만 전국에서 3만여명의 신도와 2500여명의 스님들이 다비식에 참가, 서옹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 1시간 전인 오전 10시께 백양사 경내는 이미 추도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에서부터 인근 시골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삼삼오오 모여든 신도들은 서옹스님을 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35년 전 처음 친견한 뒤 서옹스님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송아담씨(59·대전 중구)는 “그분의 말씀 하나, 행동 하나가 다 도였다”며 “아무리 맛있는 게 앞에 있어도 소식하고, 더 드시라고 해도 ‘눈으로 먹었으니 배부르다’고 말씀하셨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산에서 온 문모씨(63)는 “몇 년 전 처음 스님을 뵈었을 때 어린아이 같은 웃음과 마음을 감화시키는 말씀에 찌든 마음이 다 정화되는 듯했다”며 “그 뒤로 스님의 말씀을 녹음한 테이프를 차에 갖고 다니며 듣곤 했는데 이렇게 황망히 가셔서 아쉽다”고 말했다.

    독실한 신도인 송씨 덕분에 기자는 스님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옹스님이 머물렀던 설선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서옹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시자(侍者) 호산스님이 입마개를 한 채 정좌해 있었다. 호산스님은 스님의 입적 당시 모습과 일화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큰스님에게 누가 될 말은 절대 해선 안 된다는 문도와 종단의 요청에 따라 당분간 입을 닫고 있기로 했다”면서도 상기된 표정으로 띄엄띄엄 그때 상황을 말해줬다.

    “사자 새끼 나온다, 이제 가야겠다”



    좌탈입망 선승 불꽃 피안에 가다

    서옹스님을 애도하고 있는 불자와 산방 스님들.

    12월13일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깨어난 서옹스님은 “호산 호산! 동서남북에 눈 밝은 사자 새끼가 나온다/ 동서남북에 용맹스러운 사자 새끼가 나온다”는 법문을 했다. 밤 9시50분께 서옹스님은 “이제 가야겠다”며 강사 혜권스님을 찾았고, 혜권스님이 바깥 문을 여는 순간 뎅그렁 하는 풍경소리가 울리자 앉은 채로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황토색 적삼을 입은 채 오른 발 위로 왼발을 올렸으며, 오른손바닥 위에 왼손을 놓은 채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었다. 서옹스님의 법구는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앉은 자세 그대로 입감(入龕·입관의 불교식 용어)됐다. 세수 92세, 법랍 72세.

    경이로운 죽음이었다. 좌탈입망.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서 입적을 맞이하는 좌탈(坐脫)과 선 채로 열반에 드는 입망(立亡)을 합친 말이다. 일반적인 경우처럼 누워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평소 공부하거나 수행할 때의 모습 그대로 열반을 맞이한 수행자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도 열반에 든 뒤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거꾸로 서서 입적한 당나라 은봉선사, 스스로 다비할 땔감을 준비한 뒤 그 위에서 열반한 관계선사, “시신을 벌레에게 주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청활스님, 앉아서 죽음을 맞은 한암스님과 성철스님, 만암스님의 입적 순간도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장곡스님(갑사 주지)은 “오랜 세월 자신을 닦은 분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놓지 않을 때에야 좌탈입망이 가능하다”며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후학들에게 덧없는 육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11시께 대웅전 앞마당에서 영결식이 시작되면서 눈발은 더 굵어졌다. 잎 떨군,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들과 산과 사람들이 모두 눈을 이고 애도의식을 치렀다.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은 영결법어에서 “허철영통(虛徹靈通·비어 있음을 꿰뚫어 신묘하게 통함)했던 노승의 진면목은 분명하고 명백하나 찾아보면 흔적이 없고 아득하고 심오하나 지금 눈앞에 있다”고 추모했다.

    1시간 30여분간 진행된 영결식이 끝나고 스님의 행적을 기리는 글귀를 적은 수백여 깃발들을 선두로 해서 법구와 스님들, 재가자들이 0.5km 떨어진 다비장까지 긴 행렬을 이루며 뒤를 따랐다. 미끄러운 길 때문에 행렬이 다 도착하기까지 30분이 넘게 걸렸다. 뭇 불자들은 끊이지 않고 “석가모니불”을 외며 숙연한 걸음을 옮겼고,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을 적은 플래카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아직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한 번 백학이 나니 천년 동안 고요하고/ 솔솔 부는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내네(雲門日永無人至 猶有殘春半落花 一飛百鶴千年寂 細細松風送紫霞).’

    서옹스님이 불가에 귀의하게 된 계기는 17세 때 조모와 모친이 별세하자 생사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면서부터. 이후 일제 강점기의 굴욕과 울분을 지닌 채 21세 때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2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 겸 조실로 추대되며 대중교화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67년 백양사 쌍계루 아래 돌다리를 건너다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문득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1974년 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됐을 때 “닭벼슬보다 못한 것이 승직”이라며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결국 종도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종정에 취임한 뒤 스님은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가 남긴 ‘임제록’을 쉽게 풀이한 ‘임제록연의’를 내놓는 등 흐트러진 선문(禪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백양사 방장으로 있던 1998년 스님은 80여년 만에 무차대법회(無遮大法會·지위고하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법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열었다. 당시 스님은 “현대인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타락해 갈등과 싸움을 일삼고 있다”며 “본래 지니고 있는 참사람의 성품을 발견할 때 사바세계의 갈등과 투쟁은 사라지고,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서로 존중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고 설파했다.

    서옹스님은 평소 참사람 운동을 펴왔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참나’와 ‘참사람’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갈등과 투쟁이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서로 존중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참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걸림 없는 참사람)을 이르는 말로, 스님이 1941년 일본 임제대 졸업논문으로 ‘진실자기(眞實自己)’를 발표한 이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평소 데카르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등 서구 철학자와 자연과학 등을 인용하며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는 법문으로도 유명했던 스님은 ‘선과 현대문명’ ‘절대 현재의 참사람’ 등의 저서를 남겼다.

    ‘참사람’의 다비식은 오후 1시30분께 ‘거화(擧火)’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25명의 스님이 연화대(蓮花臺)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굵은 눈발에 젖은 연화대는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온전히 환하게 타올랐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스님과 불자가 100여명에 달했다. 탑돌이처럼 연화대 주위를 계속 돌며 복을 비는 이들도 있었다. 여타 종교지도자의 장례식과 달리 불교 다비식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불교신문 조병활 차장은 “큰스님을 추모하는 뜻도 있지만 참가자들은 다비식에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확장하고 슬픔은 줄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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