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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일탈은 ‘롤러코스터’

미쳤냐고? ‘금지된 장난’ 재밌잖아

일상에서 외도·스트레스 해소 ‘일탈’ 열풍 … 알 수 없는 집단행동 ‘플래시 모브’ 확산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미쳤냐고? ‘금지된 장난’ 재밌잖아

미쳤냐고? ‘금지된 장난’ 재밌잖아

악마적 무대 매너로 인기 높은 미국 록 그룹 ‘메릴린 맨슨’(왼쪽)과 분장 카페 ‘해열제’에서 일탈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

10월4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은 미국 록그룹 ‘메릴린 맨슨’의 공연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거침없는 욕설과 파격적 성 묘사 등 악마주의적 무대 매너로 유명한 맨슨이 한 여성 댄서의 속옷 안에 마이크를 넣고 신음 소리를 흘리자 5000여명의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18세 미만 관람 불가’였던 이 공연의 관객은 대부분 20, 30대. 이들은 맨슨의 악명 높은 일탈행위에 기꺼이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열렬히 환호하는 팬들 앞에서 키보드 주자 마돈나 웨인 게이시는 악기를 바닥에 내던졌고, 다른 멤버들은 무대 위를 기어다녔다. 급기야 마이크 받침대를 객석에 집어던지기까지 했지만 팬들의 열광은 멈추지 않았다. 흥분한 멤버들이 계속 사운드 볼륨을 높이다가 결국 장비가 고장나 연주가 중단될 때까지 무대와 객석의 ‘광란’은 계속됐다.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공연장을 찾은 한 회사원은 “메릴린 맨슨의 음악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며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음악을 즐기다 보면 또 다른 내가 된 듯한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3차례나 한국 공연이 불허됐던 메릴린 맨슨의 성공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일탈’이 매력적인 유희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준 계기였다.

일탈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상이나 조직, 규범 등에서) 벗어남, 빠져나감’. 그래서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일탈’은 정상궤도를 벗어난 문제아에게나 찍힐 만한 낙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것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선택하는 방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모범생’들은 스트레스 해소법의 하나로 색다른 곳에서의 일탈에 몰입한다. 혹은 상식적인 행동방식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서 개인적으로 탈출함으로써 ‘일탈’한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상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파격과 열광 … 또 다른 나를 만나는 희열”

최근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플래시 모브(flash mob)’ 열풍은 ‘짜릿한 일탈’의 붐을 보여주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이 기묘한 단어는 인터넷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을 뜻하는 말인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참여군중 ‘스마트 모브(smart mob)’가 결합된 신조어. 우리말로는 꼭 맞게 옮길 만한 단어가 없지만, 굳이 풀어서 말한다면 ‘집단 이상행동’ 정도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메일을 통해 약속장소를 정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알 수 없는 행동을 벌이는 것이 바로 플래시 모브.

지난 6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플래시 모브에 참가한 사람들은 한밤중에 도심의 호텔 로비에 모여 15초 동안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며 공연장에서 ‘앵콜’을 요청할 때와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다 흩어졌다. 이들이 왜 그 시간에 그곳에 모였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하고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유일한 목적은 ‘재미’이기 때문이다.

플래시 모버들의 행동강령은 ‘just for fun’. 평범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일탈의 희열을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다.

미쳤냐고? ‘금지된 장난’ 재밌잖아

서울 강남 코엑스 몰에서 열린 코스프레 행사 참가자들.

플래시 모브를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 빌(Bill)은-그의 신원에 대해선 문화산업 종사자이며 뉴욕에 산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일에서나 논리적인 이유를 찾는 사람들이 사는 이 도시에서, 단지 바보스럽기만 한 즐거움을 갖는 것은 멋진 일 아니냐”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의미 없음이며, 플래시 모브에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플래시 모브가 주목받게 된 건 이 의미 없는 일탈이 보도된 후 파리와 런던, 로마, 모스크바, 도쿄 등지의 젊은이들이 이를 흉내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세계 곳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도심 광장에 줄지어 선 채 함께 신문을 읽다 사라지거나, 길 한복판에서 새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며 ‘자연의 소리’라는 노래를 부르는 일이 벌어졌다. 서점에 몰려들어 없는 책을 팔라고 요구하다 일제히 나가버리거나 UFO(미확인비행물체) 소동을 벌이며 갑자기 30여초 간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플래시 모브가 등장했음을 대외적으로 알린 사건이 9월20일 오후 7시 명동거리에서 일어났다. 젊은이 20~30명이 돌연 하늘을 가리키며 ‘외계인이다’라고 소리치고 한참이나 하늘을 응시하다 그 자리에 일제히 쓰러져버린 것. 이들의 휴대전화에서는 동시에 알람 소리가 울렸고, 2분 가량 실신한 듯 꼼짝하지 않던 이들은 또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이 행동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한국의 플래시 모버들 역시 ‘그냥’ 혹은 ‘재미있어서’라고 답하고 있다. 이번 ‘기행(奇行)’을 주도한 플래시 모브 카페(cafe.daum.net/flashmob)의 운영자 ID 홍어리씨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자 하거나 어떤 사회적 반응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왜’라는 질문은 접어두고 그냥 순간의 느낌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날 플래시 모브에 참가한 한 대학생도 “신문을 통해 외국의 플래시 모브 사례를 보고 ‘신선하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해봤는데 정말 짜릿했다”며 “살다보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탈이 있지 않느냐. 그것을 함께 하며 즐기는 것인데 왜 거기서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플래시 모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신 다다이즘’ 등 다양한 잣대로 분석하려는 이들의 노력을 무색케 할 만큼 일관되게 ‘재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참여하는 인터넷 카페의 소개말도 ‘평소에는 상상만 하던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플래시 모브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다.

그 안에서 네티즌들은 ‘10원짜리를 거리에 막 뿌린 후 물을 주면서 얼른 자라라고 합시다’(플레쉬맨)라거나 ‘넓은 광장에 모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 어떨까요’(taiji) 등의 다양한 제안을 내놓고 있다. 말 그대로 철저히 의미 없는 일탈이다.

미쳤냐고? ‘금지된 장난’ 재밌잖아

엽기적이고 파격적인 내용으로 유명한 록 뮤지컬 ‘록키 호러 쇼’.

특징적인 것은 이 일탈 욕구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7월 말 처음 ‘수입’된 플래시 모브는 두 달 만에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10여개의 전문 모임이 생겨났을 만큼 크게 확산됐다.

우리나라에 플래시 모브를 처음 들여온 네티즌 문모씨(23·대학 휴학생)는 “처음에는 외국 사례를 보고 따라 했는데 이제 외국에서는 별 움직임이 없다”며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플래시 모브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재미있는 일탈’ 열풍은 오프라인에서도 불고 있다. 다양하고 특이한 이벤트 카페의 인기가 그 증거다. 서울 신촌의 분장 카페 ‘해열제’는 손님들에게 일상 탈출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곳. 이곳의 손님들은 카페에 입장하기 전 모두 700벌의 의상과 120개의 가발, 다양한 소품이 준비된 이 카페의 분장실에서 색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변신할 수도 있고, 인어공주나 드라큘라, 혹은 마녀로 탈바꿈하는 것도 가능하다. 10여분 간의 분장을 통해 새로 태어난 후 홀에 나가면 빠른 테크노 음악과 어두운 조명이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가려준다. 동행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자신’으로 한 번쯤 자유롭게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유희적 일탈’ 자연스러운 사회 의미 있는 일

이 카페의 매니저 윤정섭씨(25)는 “이곳을 찾는 이들은 지루한 자신의 일상을 잊어버리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고 좋아한다”며 “예전에는 손님의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요새는 30대 직장인들도 꽤 찾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흥이 나면 누구나 무대에 뛰어 올라와 밴드의 악기를 이용해 ‘제멋대로 연주’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강남의 카페들과 기념일날 영화 같은 이벤트를 벌여주는 마술 카페, 이벤트 기획사 등도 한 번쯤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일탈 열기에 대해 경성대 철학과 김재기 교수는 “원래 금기나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이러한 욕구가 자연스레 발현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염색을 하거나 귀고리를 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스러운 개성 표현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자유로워졌다는 증거”라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도 ‘일탈의 일상화’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잘한 일탈은 사람들에게 답답한 일상을 버텨낼 힘을 준다”며 “직장생활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록 그룹 공연에서 한 번 ‘미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이의 일상은 아무런 일탈도 하지 못하는 이의 그것에 비해 건강하지 않겠는가. 최근의 여러 현상들은 이제 우리 사회도 일탈을 재충전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에 지금의 ‘유희적’ 일탈은 진정한 일탈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일상과 일탈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언제든 쉽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이뤄지는 일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낭만적이지만, 오히려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점점 멀어지게 하는 함정일 수 있다는 비판이다.

분장 카페나 플래시 모브에서 짜릿한 희열을 느낀 후 다시 조용히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는 이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유희적 일탈을 비판하는 이들은, 월드컵의 환희 속에서 자신의 표현력을 최대한 발휘하던 젊은이들이 결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취업 준비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수원대 이교수는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일탈이 결코 전복적이거나 체제 위협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철저히 상업적 요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러한 일탈은 자신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에서 버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탈정치적이고, 철저히 개인적인 플래시 모브 참가자들은 끊임없이 ‘일탈’하지만 일탈을 필요로 하는 답답한 현실, 그 자체에서 일탈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경성대 김교수는 “자본주의의 힘은 일탈조차도 문화의 하나로 편입시켜 버린다는 점”이라며 “유희적 일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이것이 일상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경우 사회는 진정 자유로워질 힘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407호 (p66~68)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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