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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피맛골의 위기

情 마시고 추억 씹는 곳 ‘시인통신’

열 평 남짓 카페가 21년간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독재 아픔 토로하던 역사의 흔적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情 마시고 추억 씹는 곳 ‘시인통신’

情 마시고 추억 씹는 곳 ‘시인통신’

\'시인통신\'의 명물 김학종 할아버지는 밤이면 통기타를 메고 이곳을 찾아와 테이블 사이를 돌며 노래한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8월28일 오후 10시. 서울 종로구 피맛골 카페 ‘시인통신’에서는 한 남자가 소리 높여 ‘그 집 앞’을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조용한 박수 소리가 울려 나왔지만 누구 하나 환히 웃지 않는다. 조용해진 공간 사이로 카페에 흐르고 있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비로소 들려왔다.

이들은 ‘피맛골’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찾아온 옛 단골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노래만으로도 서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안다. 오갈 때마다 그리워 발길을 멈추게 할 곳, 피맛골과 ‘시인통신’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맛골 ‘시인통신’을 ‘이 시대의 섬’이라고 부른다. 번잡한 종로거리 한켠, 꼬불꼬불한 뒷골목 사이에 자리잡은 이곳에서는 40~50대 ‘중늙은이’들이 모여 아직도 시를 이야기하고, 통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다.

1982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0번지의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곳에는 언론인 김종철 김중배 김재곤, 철학자 황필호, 시인 마광수 박경용 김춘랑 김신용 김홍성 이용범, 화가 이목일 강찬모, 전위예술가 무세중, 국문학자 구인환, 소설가 오인문 박상우 등 당대의 문인·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옛 외상장부엔 유명인들 별칭 수두룩

情 마시고 추억 씹는 곳 ‘시인통신’

시인 마광수(왼쪽사진 왼쪽), 화가 이목일 (오른쪽 사진 맨 오른쪽) 등은 ‘시인통신’의 단골이다. 주인 한귀남(맨 왼쪽)씨는 그들 모두에게 ‘누님’으로 통한다.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던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든 합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서슴없이 친구가 됐다. 아니, 자리가 없어도 엉덩이를 들이밀고 무릎 위에까지 올라앉아 역사와 시대를 논하던 이들은 사실 ‘식구’였다.

80년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주동자였던 학생들의 부모가 모여 재판 결과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린 곳이 이곳이었고, ‘즐거운 사라’ 논란 때문에 징역을 살고 나온 마광수 교수가 출소 인사를 온 곳도 이곳 ‘시인통신’이었다.

서른도 안 된 당대의 문학청년(문청)들은 ‘시인통신 발전 연구회(시발연)’라는 그럴 듯한 모임까지 만들어놓고 하루종일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역시 등단 시인인 주인 한귀남씨가 나오기 전이면 그냥 자신들이 가게문을 열고 들어와 술을 마셨다. 누렇게 바랜 도배지 아래로 흐릿하게 남은 글씨들. ‘누나, 내가 너무 먹고 싶어 술 좀 먹었거든. 나중에 크게 되면 갚을게’ 같은 낙서가 그때의 흔적들. 이승철 시인은 한씨에게 “누나, 민주화만 되면 교보문고가 누나 꺼야. 누나에게 대한민국을 다 줄 테니 지금은 술 좀 주우”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술값 대신 슬그머니 시 두 편을 내놓고 가던 ‘화상들’.

빛 바랜 ‘시인통신’의 외상장부를 펴자 그 시절의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날짜 없이 일련번호와 금액만 적혀 있는 이 공책에는 외상술을 먹은 손님 이름은 없다. ‘눈 큰 아우’ ‘한국일보 동생 또 동생’ ‘나으리’들이 있을 뿐이다. 본명도 연락처도 없다. 언젠가 돈이 생기면, 그리고 외상술 마신 일을 기억한다면 와서 갚을 것이라고 믿었으니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그러나 이 같은 별명들만 살펴봐도 ‘상습범’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오선생’. 그는 이 외상장부에 246번, 250번, 256번, 267번, 270번까지 한 장에 내리 다섯 번이나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다음 장을 넘겨도 또 마찬가지다. 305번, 313번, 321번, 367번이 오선생. 이 악명 높은 ‘오선생’은 다름 아닌 소설가 오인문씨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가 ‘돈 없는 술꾼’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서울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어 그래도 돈이 있는 축에 끼었던 덕. ‘오선생’은 후배들에게 “술값 없으면 내 이름 달아놓고 맘껏 먹어라”고 말할 만큼 배포 큰 선배였고, 후배들은 주저 없이 그의 이름을 ‘팔았다’. 네 돈 내 돈이 따로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情 마시고 추억 씹는 곳 ‘시인통신’

이제 곧 사라지게 될 피맛골 골목 전경.

무심코 외상장부를 뒤적이던 손님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옛날의 외상기록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적어놓은 ‘통신문’도 눈에 띈다.

“조재훈, 해결합니다. 7만원정! 한귀남 누님, 이렇게 적어놓으면 우짤라고!” 그는 한씨가 자리에 없는 사이 가게에 왔다가 외상장부에 돈을 끼워넣고 사라졌단다.

물론 이제는 시인통신에서도 이 같은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카드를 받기 시작한 후부터 ‘외상’이 발붙일 수 없게 됐고, 당시의 문청들은 어느새 번듯한 중년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는 쌓일 수 없는 옛추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홍근이는 혜연이를 사랑해’라는 유치한 낙서부터 ‘내가 여기 올 때 이것이 여기 있었다. 내가 다시 여기 왔을 때 이것이 여기 없었다. 아니, 이것이 여기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다’ 같은 개똥철학을 담은 글까지 문청들이 써갈긴 낙서는 오늘도 시인통신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가 강찬모씨가 술값 대신으로 그린 벽화, 액자 위에까지 촘촘히 채워놓은 술꾼들의 낙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책 한 권, 탁자 하나에도 추억이 쌓이지 않은 곳이 없다.

‘시인통신’ 단골들은 문 아래 뚫린 창문을 안줏거리 삼아 술을 마시기도 한다. 이 창문이 빛을 본 것은 최근의 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창에는 빛이 새나갈 수 없도록 항상 5mm 두께의 스티로폼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12시 이후 심야영업이 금지됐던 시절, 밤이 새도록 자리를 뜨지 않던 술꾼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민노당 권영길 대표도 수배시절 단골

‘잡놈 이야기 들어서 뭐에 쓰냐’며 묵묵히 잔만 비우던 40대 칼럼니스트는 술이 오르자 “그리운 건 이 공간이 아니야. 시인통신이 사라지고 나면 여기에만 있던 고운 마음, 추억들, 그게 그리워서 못 견디겠지”라며 입을 열었다

“12시가 넘으면 문을 걸어 잠그고 술을 마셨어. 누군가 취해서 노래를 부르면 옆에 앉은 이들이 달려들어 입을 막았지. 그래도 수시로 경찰한테 들켜서 누님이 벌금 맞고 문을 닫았던 적도 많았어.”

“그래서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살짝 염탐했잖아. 그때 암호가 뭐였는지 알아요? ‘길 잃은 기러기’였다오. 거나하게 취한 문인들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길 잃은 기러기 열 마리가 떨고 있소. 누님, 문 좀 열어줘요’라고 속삭이곤 했었지.”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도 그 시절 이 집 단골이었다. 그는 언론노조 운동으로 수배중일 때도 이곳을 찾았다. 이 공간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은 모두 그가 수배자임을 알면서 오히려 그를 에스코트했다.

주인 한씨는 정치를 시작한 후 바빠지면서 자주 들르지 못하는 권대표를 아직도 ‘오라버니’라고 부른다. 경남이 고향인 그는 시인통신을 나설 때면 언제나 빙긋 웃으며 “귀남아, 단디해라. 알았제”라고 다독이곤 했단다.

민주당 김영환 김태홍 의원도 젊은 시절 이곳을 사랑했던 단골들. 소설가 구인환 교수, 국악인 변규백씨, 이종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백일씨, 연극연출가 황남진씨, 수필가 정목일씨, 화가 이목일씨 등은 요즘에도 시인통신을 찾는다.

이들은 피맛골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찾아와 ‘누님, 우리가 있는데 쉽사리 무너지겠소’ 하며 주인 한씨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시인통신 살리는 데 보태라’며 슬그머니 돈봉투를 두고 사라지기도 했다.

구인환 교수는 한씨에게 ‘우리의 시인통신 마음의 고향이 이 자리에서 영원하기를’이라는 글귀를 자필로 적어주고 갔다. ‘추억이 사라지면 나라 정신도 사라진다. 피맛골 방황하던 내 20대. 택시비 빌려주던 누님 파이팅’이라는 이종주 시인의 글에는 이곳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 있다.

그러나 1세대 문인·예술가들과 2세대 지사적 주당들, 그리고 오늘의 3세대 가난한 샐러리맨들의 공간인 피맛골과 시인통신은 이제 사라질 날을 앞두고 있다. 이 공간을 무너뜨리고 세워지는 것은 20층 높이의 고층건물이다.

‘정작 슬픈 것은 이별이 아니다/ 천 번의 이별이 두렵겠는가/ 이별이 아니다/ 서러운 것은 이별이 아니다/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누군가 일어나 강제윤 시인의 ‘보길도’를 읊는다. 피맛골이 사라지면 함께 묻혀버릴 그 수많은 이야기와 옛추억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까.



주간동아 401호 (p70~72)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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