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1

2003.04.24

산산이 부서지는 ‘아랍 자존심’

무기력한 공동 대응 ‘형제 국가’ 대의 소멸 … 중동질서 재편 순응 압박 ‘전전긍긍’

  • 금상문/ 학술진흥재단 지원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keumsm@hanafos.com

    입력2003-04-17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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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이라크로 진격한 지 3주일 만에 바그다드에 입성함으로써 전쟁은 마무리돼가고 있다. 이라크 국민 가운데 일부인 이슬람 시아파와 이슬람 수니파가 독재자 사담 후세인으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아랍국가와 국민들은 미군에 의한 후세인 정권의 종말을 지켜보면서 패배감, 무력감, 좌절감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커진 반미정서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라크전쟁을 통해 확인됐듯이 아랍국가들은 아랍통합과 반제국주의 기치로 뭉친 아랍민족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만 위태로워졌다. 두 국가는 그동안 전쟁을 막기 위해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에게 미국이 요구하는 사항-생화학무기 제거, 공화국수비대 해체, 자유선거 실시, 아랍·이스라엘 평화 과정 참여 등-을 수락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이런 전쟁 방지 노력은 후세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어느 정도 중동질서 유지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아랍연맹도 제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전 아랍국가들을 회원으로 한 아랍연맹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주도로 어느 정도 아랍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열린 아랍연맹 회의에서 이집트 대표는 꿀 먹은 벙어리였고, 그나마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낸 것이 전부였다. 과거 같으면 미국에 대한 비난과 성토에 이어 곧 아랍연맹 산하 아랍평화유지군을 분쟁지역으로 파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아랍연맹은 숨을 죽인 채 미국의 이라크 파괴를 지켜보기만 했다. 현시점에서 아랍국가들 간의 질서는 무너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랍연맹, 숨죽인 채 이라크 파괴 지켜볼 뿐

    더욱이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과거에는 거의 모든 아랍국가가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해 애쓰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를 열렬히 지지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평화 정착에 적극 노력하고 있다. 이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인정하고 외교사절을 교환하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2002년 6월 “야세르 아라파트가 제거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처럼 미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경시하는데도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손을 잡지 못해 안달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후 이스라엘 전폭기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습했지만 아랍국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랍국가들이 더욱더 몸을 사리게 된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리아 압박 작전이다. 미국은 시리아를 권위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다음 목표를 시리아로 삼은 듯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월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은 “시리아를 비롯한 다수 국가들은 이라크전에서 메시지를 얻음으로써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거나 국가정책상 테러를 선택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며 은근한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은 시리아에 대해 “테러리스트 명단에 들어 있고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다며 ‘악의 축’까지는 아니더라도 손봐줄 상대”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 합법단체다. 또한 시리아는 독재자 아사드 하피즈 대통령이 사망한 후 의회선거를 실시해 민주적 의회의 기능을 갖추는 등 어느 정도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시장화와 개방화 정책을 수행하고 있어 후세인 정권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도 미국은 도미노이론(이라크를 중동의 새 축으로 삼아 아랍국가들에 민주화 압력을 가하고 이란·시리아·리비아 등에 강경책을 동원한다)을 앞세워 아랍국가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시리아산 석유가 주로 프랑스와 독일에 수출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프랑스와 독일의 비난을 무릅쓰고 시리아를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시리아 공격 운운하며 프랑스와 독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양 국가가 이라크 전후 복구에 참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이런 실정인데도 만약 미국이 이스라엘과 손잡고 시리아를 공격한다면 미국은 세계의 거센 반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바그다드가 점령당한 이후 미국이 시리아를 겨냥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쏟아놓으며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아랍국가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아랍의 대의(大義)가 소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랍 형제국가에 대한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이라크전쟁 후 아랍국가들은 미국 주도의 중동질서 아래에서 국가의 자율성을 일부 상실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무역자유화, 기업의 민영화와 사유화, 금융의 자유화, 국가의 시장개입 철폐와 규제 철폐,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이라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이들 국가를 압박할 것이다.

    이슬람 부흥주의자들 ‘반미투쟁·지하드’ 불 보듯

    이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현상은 20세기 말부터 중동에 밀려들어 왔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불문헌법을 성문헌법으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편적인 결과일 뿐 이제부터 미국은 아랍 걸프만 국가들에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국민의 정치참여 같은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다. 또 세계경제 내에서 살아남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금융 부문과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경제원칙에서 거의 금기시되던 주식의 활성화와 주식시장 개방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경우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두바이 증권거래소의 문을 열어야 하고, 쿠웨이트·오만·카타르에서는 사기업 활성화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식시장 개방 조치가 단행될 것이다.

    아무튼 이라크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질서 아래서 아랍국가들 간의 하부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어, 미국의 지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순응이 곧 아랍국민의 정서를 대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아랍국민들은 상당기간 좌절감 속에 반미의식을 키워나갈 가능성이 높다. 좌절이 공격으로 변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철저히 반미투쟁과 지하드(성전)에 나설 것이다. 그들의 1차 목표는 미국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아랍국가들과 미국자본주의의 상징물이다. 그만큼 9·11 테러와 같은 사태가 반복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전쟁의 끝이 곧 평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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