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가 일제히 문을 연 2월5일 수요일 오후의 인사동 거리가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2월 한 달간 인사동 지역의 화랑 57곳에서 수요일에 시작되는 전시회는 전체 137개 가운데 127개로 92%나 된다. 그나마 몇 개의 기획전이나 상설전을 빼고 나면 거의 대부분이 수요일에 문을 여는 셈이다.
인사동과 달리 상설전이나 기획전이 많은 이웃 사간동과 광화문 일대에도 수요일에 전시회 오프닝을 하는 화랑이 많지만 인사동처럼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화랑 관계자들이 담합(?)한 것이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인사동 화랑의 수요일 오프닝 연원은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한다. 75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인 현대화랑(현재 사간동의 갤러리 현대)이 인사동에 자리잡은 뒤 덕수미술관 문예진흥원 등이 뒤따라 들어앉고, 일정 기간 작가에게 화랑을 빌려주는 대관화랑이 생기기 시작한 어름으로 보고 있다. 대관화랑은 74년 무렵 골동품에 대한 정부의 중과세 조치로 골동품 가게들이 문을 닫자 그 자리에 들어선 화랑들이 시초.
그런데 왜 하필 수요일일까? 갤러리 사비나 이명옥 관장은 “이전에는 관람객이 미술계 인사 중심으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전시기간이 1주일 정도면 볼 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다”며 “그래서 한 주의 중간 날이자 화가들이 이동하기 편한 수요일에 전시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공감대가 화랑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돼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화랑 문화
국립현대미술관 정준모 학예연구실장은 “대관화랑은 일주일 단위로 대관비(요즘은 300만~500만원)가 책정되는 데다 관객들에게는 주말보다 평일 관람이 부담이 적고 화가나 미술 관계자들에게는 한번 나가서 아는 얼굴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화랑이 수요일에 전시를 시작하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이는 물론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화랑문화다. 인사동 화랑가를 찾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캐나다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바루흐 고틀립(36)은 “베를린이나 유럽지역에서는 대개 주말에 전시를 시작한다”며 “애호가들이 한 주의 일을 끝내고 가족들과 함께 전시장을 찾아 즐기는 게 관행이다”고 말했다. 즉 유럽이 애호가 중심의 관람문화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해 국내는 미술계 인사 중심의 관람문화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수요일 오프닝’이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수요일마다 인사동은 미술인들의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에 가입한 화가만 1만5000명, 여기에 비가입 화가와 학생들까지 더하면 미술인구는 줄잡아 10만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 졸업전을 하는 신인 화가들뿐 아니라 중견화가들까지 모두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인 데다 아마추어 애호가들도 꾸준히 늘고 있어 전시회가 시작되는 수요일 오후면 인사동 거리는 늘 북적거리는 것이다.
2월5일 수요일, 인사동, 저녁 7시. 흔히 전시회 뒤풀이 장소로 이용되는 P식당에 미술 관계자 20여명이 모여 앉았다. 이날 그룹전 ‘움직이는 정물전’(2월5일~3월2일, 두아트 갤러리)을 오픈한 작가 5명을 축하하는 자리에 이들의 선후배, 큐레이터, 미술저널리스트, 갤러리 주인 등 지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미술저널리스트 김준기씨는 “뒤풀이 자리는 시골장터와 비슷하다”며 “서로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작가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관계를 재정립하는 네트워크의 장이다”고 말했다. 여전히 작가의 생활이 힘든 상황에서 작가들이 전시를 축하하는 한편 서로의 힘든 처지를 위로하고, 인맥을 넓히는 계기로 삼고 있다는 것.
뒤풀이 자리에서 전시회를 연 화가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있는 지인들.‘움직이는 정물전’이 열리고 있는 두아트 갤러리 전경과 유희경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상 내부 모습.(위 부터)
뒤풀이 자리에서는 전시 작품에 대한 얘기를 일절 주고받지 않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정준모씨는 이에 대해 “고생한 이를 축하하고, 부조하러 간 자리에서 가시 돋친 소리를 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P식당에 모인 이들 역시 작품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는 살아가는 이야기나 요즘 미술가의 이슈를 화제로 삼았다.
“친소관계를 따져 기사를 다루는 매스컴이 가장 문제야. 끼리끼리 뭉치는 패거리 의식도 문제고.”
“화랑은 연줄과 지명도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하다 보니 숨어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어.”
화랑 주인도 이 자리에 빠질 수 없다. 두아트 갤러리 도형태 사장은 “화랑이 문을 연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화랑의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해 기획전을 많이 열 예정”이라며 “요즘엔 작품이 잘 팔리지 않기 때문에 컬렉터 유인책으로 작품값에 대해 카드 할부도 해주고 있는 형편”이라고 토로했다.
두아트의 ‘움직이는 정물전’에 참여한 정광호·김동유·배준성·송영화·한수정·황혜선씨 등 작가들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특이하게도 자신들이 직접 이 주제를 기획해 화랑을 대상으로 섭외에 나서 전시회를 열게 됐다.
대부분 사람들 전시회에 무관심
이들은 원래 미국 뉴욕과 독일 베를린 등지에서의 해외 순회전을 생각하고 이런 제목을 지었지만 출품작 자체도 움직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 정물이 꽃·병·의자 등 멈춰 있는 사물의 본질을 해석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출품작들은 기존의 평면적인 정물그림 개념에서 벗어난 설치작품과 사진에 붓질을 가미한 작품 등이다. 뒤풀이 자리에 참석했던 서양화가 강홍구씨는 “줄을 아무렇게나 내리그은 뒤 낱장을 여러 장 쌓아 의도하지 않은 꽃무늬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나 항아리나 잎의 형태를 구리선으로 제작해 설치한 작품 등에서 정물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갤러리 상에서 시작된 유희경전(2월5~14일)도 새로움과 기성에 대한 도전정신으로 가득한 이색 전시회다. 유씨는 여러 장을 찍어내는 판화의 속성을 과감히 버리고 석판에 잡지 인쇄물을 재구성, 다시 인쇄해 한 점뿐인 판화를 내놓았다. 도시적 감성이 빛나는 그의 작품들은 갇혀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하고 비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번으로 다섯 번째 전시를 하게 된 유희경씨는 “전시를 할수록 부담감이 더욱 커져간다”면서도 “그럴수록 자신의 맹점을 더 잘 볼 수 있어 금세 다음 전시를 기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화랑 안으로 한 발짝만 들여놓아도 우리는 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무관심하다. 수요일 오후 인사동에 간다면 판화가 유희경씨의 말을 떠올려볼 일이다. “화랑에는 매번 들르는 이들만 찾아와요. 미술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화랑에 찾아와 작품을 감상하고 거기에서 무언가 발견하게 된다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겁니다.”
점차 인사동 화랑가가 소규모 대관전에서 대형 기획전 중심으로 재편돼가는 상황이어서 이제 ‘수요일, 인사동의 전시 오프닝과 뒤풀이 풍습’을 볼 날도 많지 않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인사동의 음식점과 술집에서 밤늦도록 화가와 지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 전통은 오래 계속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