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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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

  • 우찬규 / 학고재 대표

    입력2003-02-12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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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다.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에게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나마 전하고자 함은 비록 헛되다 해도 남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한 방식이 된다. 그래서일까, 미 항공우주국도 공중폭발의 원인을 찾고자 눈에 불을 켰다. 처음에는 왼쪽날개에 부딪힌 연료탱크의 파편이 주범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 자는 믿을 수 없고 황망하다. 고작 길이 51cm, 무게 1kg의 단열재 쪼가리가 그 엄청난 폭발을 불렀다니 말이다.

    전문가들은 모두가 수긍할 만한 원흉을 다시 찾고 있다. 자동 비행통제 시스템에 주목하는가 하면, 지구 궤도를 떠도는 우주 쓰레기에도 혐의를 둔다. 인재에 의한 사고이든, 천재에 의한 사고이든 그들은 거리낌없이 까발릴 것이다. 미국의 힘은 왕왕 그렇듯이 근치(根治)에의 집착에서 발견된다. 하물며 우주적 팬터지에 치명상을 안긴 사고임에랴.

    9·11 테러, 우주선 참사 와중 전쟁은 ‘요망한 일’

    산화한 승무원들에게 바치는 미국의 진인사(盡人事)는 분명 눈물겹다. 그들의 첨단 과학적 조사방식은 부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똬리를 튼다. 그것은 끝장을 보려는 그들의 안간힘이 허망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찌 보면 억하심정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 첫머리에 김소월의 ‘초혼’을 끌어들였으니 굳이 그 시에 내 심정을 가탁하자면 이렇다.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부디 나의 토로가 초상집에서 주절대는 문상객의 무례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은 까닭이다. 누가 씨앗의 결과가 열매라고 말할 때, 그 명쾌한 단순성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지나친 단순성은 삶의 비의(秘儀)를 제거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수화지풍(水火地風)으로 세상을 설명하지 못하며, 세포로 인간을 도해하지는 못한다.



    떨어져나간 단열재가 컬럼비아호를 박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체에 붙은 얼음 한 조각도 불운을 초래할 수 있으며, 콩알만한 운석도 능히 미국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철두철미한 미국은 원인을 캐내는 데 성공할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규명된 원인을 토대로 처방전도 마련하고 예방책도 수립할 것이다. 그것으로 다인가. 아닐 것이다. 남은 게 있다. 그것은 이 사고에 얽힌 ‘미묘한 조짐’과 ‘두려운 상징성’이다. 과연 미국은 그 조짐과 상징까지 궁구할 것인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미국의 안간힘은 허망이자 도로에 불과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미국은 눈뜨고 보기 어려운 참사를 겪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둥을 뿌리째 무너뜨린 9·11 테러는 상기하는 것조차 공포다. 컬럼비아호에 떨어진 날벼락은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이 와중에도 그들은 인류의 과반수가 반대하는 이라크 전쟁을 벼른다. 가공할 참사를 겪은 그들이 가공할 결전을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어떤 조짐인가. ‘중용’은 귀띔한다. ‘나라가 흥하려 할 때는 반드시 상서로움이 앞서 나타나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반드시 요망한 일이 먼저 나타난다.’

    컬럼비아호의 폭발이 요망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망하다고 하면 미신이고, 인재에 의한 사고라고 하면 과학적인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것을 두고 테러리스트의 만행이라고 말하면 정당한 것이고, 비극의 전주라고 해석하면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무릇 인간의 예지는 말하여지지 않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중용’의 예지는 조짐의 현묘함을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비단 중용만 조짐을 설파한 것도 아니다. ‘주역’도 매양 한목소리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일조일석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연유가 쌓여서 일어나고 분별해야 할 것을 일찍이 분별하지 못해 일어난다.’ 그야말로 필유곡절이로되, 비극은 하나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님을 깨우치는 말이다. 이어서 ‘주역’은 덧붙인다. ‘서리를 밟을 때, 얼음이 얼 것을 알라.’ 아닌 게 아니라 미국은 된서리를 맞았지 않은가. 이제 얼음이 어는 시절이 닥칠 것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나는 흔히 말하듯 미국의 오만을 참사의 조짐으로 강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만이 원인이라고 말하든, 단열재 조각이 원인이라고 말하든 정곡을 맞히기는 어렵다. 연유는 간단치 않은 법이다. 그리하여 미국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장자’의 한마디다. ‘천지는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天地與我 生 萬物與我爲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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