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2002.11.07

CU@K리그…꿈은 사그라지다

정치권에 휘둘리는 축구협회 파행운영… 무사안일 구단·선수들 느슨한 플레이도 냉각에 한몫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2-10-31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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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K리그…꿈은    사그라지다

    월드컵 기간중 경기장을 가득 메운 축구팬들의 열기(위쪽)와 10월27일 부천 SK와 울산 현대의 경기가 벌어진 부천종합운동장(아래쪽)의 썰렁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쌀쌀한 날씨를 탓할까. 10월23일 선두 성남 일화와 막판 뒤집기에 나선 수원 삼성의 K리그 경기가 벌어진 성남 공설운동장. 성남 일화 서포터스는 월드컵 때처럼 ‘격렬한 응원’을 벌였지만 텅 빈 운동장은 불과 60여명의 서포터스가 내뿜는 함성을 이내 삼켜버렸다. 지루한 경기가 계속되자 서포터스석에서조차 “뻥 축구 더 이상 못 보겠다” “짜증 난다”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원정팀 수원 삼성의 서포터스도 맥 빠지기는 마찬가지. 붉은악마 수원그랑브루 소모임 회장 송진무씨는 “관중이 많을 때처럼 신바람이 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모두 4623명. 리그 1위팀과 최고 명문팀 간의 한판 승부조차도 마음 떠난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월드컵 이후 달아오른 축구 열기에 힘입어 한국 프로축구는 역사적인 관중 300만명 돌파를 꿈꿨다. 그러나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찬바람이 불면 꺼질 바람”이라는 자조가 팽배했고 그것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축구계 인사들은 월드컵을 계기로 늘어난 축구팬을 고정 관객으로 확보하지 못한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 각 구단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탓했다. 또 선수들의 느슨한 플레이와 석연찮은 심판 판정, 스타급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프로축구연맹은 고육지책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의 심판까지 수입했지만 가라앉은 축구장 열기는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신문선 SBS 축구 해설위원은 “선수와 심판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축구협회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30여년 가까이 지도자로 활약해온 한 원로 축구인도 “더 이상 축구를 정치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축구협회도 정치인, 기업인이 아니라 축구인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곧장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며 ‘국민통합21’ 대선후보로 뛰고 있는 정몽준 의원을 겨냥하고 있다.

    정치를 위한 축구 행사?



    8월15일 축구 올스타전, 9월4일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의 방한, 9월7일 남북통일축구대회, 9월10일 수재민돕기 자선축구경기, 9월17일 정몽준 의원 대통령선거 출마 공식선언, 10월 첫째와 둘째 주 아시아경기대회, 10월16일 ‘국민통합21’ 창당 발기인대회 등 축구 관련 이벤트 사이에 절묘하게 끼여 있는 정치 일정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축구인들은 12월19일 대통령선거까지 모든 축구 행사가 대선 일정에 맞춰져 있다고 불평한다.

    월드컵이 끝난 후 축구협회가 한 달여를 끌다 8월 들어서야 간신히 박항서 수석코치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것부터 “히딩크를 끌어들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언제라도 내칠 수 있는 박감독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지적이 많다.

    10월1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국민통합21’ 창당 발기인대회는 마치 6월 월드컵 축제를 방불케 했다. 행사장에 ‘꿈은★이루어진다’와 같은 월드컵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리고,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부른 월드컵 캠페인송 ‘챔피언스’가 분위기를 달궜다.

    예기치 못한 박항서 감독의 항명파동과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성적 부진이 아니었다면 축구와 정치를 결합한 시나리오는 완벽한 작품이 될 뻔했다. 여기에 11월20일 열리는 브라질 대표팀과의 평가전(홍명보, 황선홍 선수가 고별경기를 할 예정이다)과 이즈음 예정된 히딩크 전 감독의 방한까지도 ‘대선 지원용’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 스포츠 평론가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라운드에서 밥 먹고 사는 축구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라며 분개했다.

    이처럼 축구가 정치에 휘둘리고 있다는 불만이 커지면서 일부에서 정회장의 축구협회장 사퇴를 요구하며 반 MJ노선을 구축하고 있다. 이른바 ‘축구협회 정풍운동’을 이끄는 사람은 이은성 경기도축구협회 부회장. 이부회장은 “전·현직 프로축구팀 감독과 축구협회 산하 단체의 핵심 인사, 축구협회 내부 인사들을 망라해 100여명으로부터 정회장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또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된 뒤에도 정회장이 축구협회장직을 유지하면 축구협회 앞에서 퇴진을 요구하는 데모를 할 수도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축구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반(反)정몽준’ 세력이 93년 정회장 취임과 함께 축구협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데다, 정풍운동의 배후에 한나라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정태훈 중고축구연맹 부회장은 “서명파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돼도 특정 정당과 연계돼 있다는 얘기 때문에 선뜻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정풍운동과 관련해 한나라당 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은 안정환 선수의 매니저인 안종복 이플레이어 대표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대우로열즈 축구단장을 지낸 안대표는 9월18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특보단(단장 김기춘)의 체육특보로 임명됐다. 안대표는 김우중 전 축구협회 회장 시절 김 전 회장의 오른팔 노릇을 하며 축구계 실력자로 통하던 인물. 김 전 축구협회장과 말을 놓고 지낼 만큼 막역한 사이였던 이은성 부회장과는 통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안대표를 가리켜 “정권이 교체되면 당장 축구협회장 후보”라고 말한다.

    이부회장은 “안종복 특보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일은 안대표나 한나라당과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서명운동은 축구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축구계가 사분오열돼 저마다 특정 정치인 밑으로 줄을 서는 모습을 좋게 보는 이들은 별로 없다. 게다가 붉은악마 신인철 회장의 사퇴 파문(상자기사 참조) 이후 “정치는 축구에서 손을 떼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축구계가 정치바람에 휘말리며 내분을 겪는 사이 관객들은 점점 더 축구와 멀어지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고스란히 이어지던 7월31일 프로축구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모두 12만7544명으로 경기당 2만5508명에 달했다. 그러나 9월 들어 경기당 관중 수는 1만명대로 떨어졌고,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이후에는 평균 5000~7000명에 불과했다.

    스포츠웹진 후추의 편집장 최준서씨는 “관객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뛰는 수준 높은 경기를 지켜본 축구팬들이 지금의 K리그에 만족할 리 없다. 월드컵 이후 아시아경기대회 우승이라는 단기적 목표보다 K리그 활성화라는 장기적 목표에 주력했어야 한다”며 꺼져버린 축구 열기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씨는 최근 축구가 재미없어진 이유 중 하나로 월드컵 이후 축구 외적인 목적으로 남발된 축구 이벤트를 꼽았다. “풍선 나눠주고 경품 준다고 관객이 축구장에 오지 않는다. 축구팬들은 최선을 다해 뛰는 선수들과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남북통일축구나 수재민돕기 자선경기와 같이 누가 이겨도 그만인 친선경기들이 잦아지면서 K리그까지 맥이 빠져버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월드컵 4강이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독이 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한 스포츠 평론가는 “한국만큼 축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에 인색한 나라에서 4강은 과분한 결과였다. 정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얻은 결과였기 때문에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16강에 머물렀던 일본은 이미 2006년 월드컵을 목표로 브라질 출신 지코 감독을 영입하고,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드컵 축배를 들고 있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신중하지 못한 감독 선임과 목표가 불분명한 대표팀 운영을 보면 2006년 월드컵은커녕 내년 5월 아테네올림픽 예선 통과도 버겁다”는 축구인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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