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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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곧 진리 그걸 모르는 기라”

‘혼자만…’ 농부 작가 전우익 선생과 하룻밤 … “곡선 아름다움처럼 다양성 있으면 좋을 텐데…”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2-10-17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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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곧 진리 그걸 모르는 기라”

    전우익씨의 수필집 3권은 농촌 삶에서 길어 올린 자연의 이치와 교훈이 시적인 필치로 담겨 있어 읽는 이에게 많은 사색거리를 제공한다.

    10월10일 아침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골짜기에 사는 농사꾼이자 작가인 전우익씨(77)를 찾았다. 10년 전 그가 쓴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2년)’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데다 그의 요즘 생활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혼자만…’은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비도덕성과 생명을 업신여기는 풍조 등을 질타하고 있다.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이 책이 다시 주목받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지은 지 84년 된 ‘ㅁ’자 형태의 기와집은 서너 가족은 족히 살 만한데 그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나마 산수유와 엄나무 등 숱한 나무가 그의 집 주변을 감싸 안고 있어 황량함은 덜했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산촌이라 그런지 서늘했다. 사랑방에 목침 베고 누워 있다 일어나던 전씨가 한마디 툭 던졌다.

    “군불 넣어놨니더. 한숨 주무이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쉬었다 가라는 소리다. 아랫목에 손을 넣으니 뜨거울 정도다. 요즘엔 시골에서도 대개 보일러를 사용하는데 그는 아직도 부엌을 개량하지 않고 앞산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로 불 지피고 지낸다. 이 집에는 문명의 이기가 별로 없다. 그 흔한 컴퓨터나 텔레비전도 없다. 원고는 연필로 쓰고, 뉴스는 라디오나 며칠 지난 신문으로 접한다.



    “이래 사는 게 편해요.”

    사랑방엔 도연명이나 노신의 저작들, 외로울 때 썼다는 낙서, 자잘한 생활도구들, 손녀 언년이의 사진, 그리고 신영복씨가 써준 글귀가 눈에 띈다.

    송대 최고의 시인 도연명의 저작은 아직도 그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다. 중학교 때 처음 도연명의 농촌시에 사로잡힌 이후 여태 그는 도연명을 놓지 않고 있다. ‘귀거래사’와 ‘한정부’ ‘오류선생전’ ‘자제문’ 같은 글을 읽으며 그는 한촌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신을 위무해왔다. ‘자연과 하나 돼 곤궁한 걸 당연하게 여기며, 쓸쓸함과 외로움도 끝끝내 견뎌낸’ 도연명을 그는 온몸으로 뒤따르고 있다.

    “자연이 곧 진리 그걸 모르는 기라”

    행랑채 옆 산수유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일부는 사람들이 따가고, 나머지는 산새들의 식량이다.

    사랑방 아랫목 책꽂이 밑에는 도연명의 잡시(雜詩·자유시)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이야기 나눌 친구 없어 술잔을 들어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한테 권한다’. 86년 아직 세상이 그를 알아보기 전에 한 낙서다.

    방안은 이것저것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그 가운데에 나름의 정돈된 아름다움이 있다. 고전 더미 사이로 벽에 붙은 박수근 그림이나 나무토막들, 흰고무신과 성냥, 잘 익은 박을 잘라 만든 전등갓, 못을 쓰지 않고 직접 만든 옻나무 필통…. 이런 것들이 그가 강조하는 단어 수졸(守拙·시세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우직한 태도를 고집함)과 닿아 있다.

    그는 슬하에 3남3녀를 뒀다. 늘그막의 그에게 ‘삶의 기운’을 불어넣어 줬던 큰손녀 언년이가 13년 전 도시로 떠난 걸 끝으로, 그의 곁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요즘엔 지인들이 많아 외롭지는 않다. 이웃 명호면의 정호경 신부나 안동의 작가 권정생씨, 여러 스님들과 지식인들이 그와 교유하며 지낸다. ‘북진거기소(北辰居其所)’. 성공회대의 신영복 교수가 그에게 써 준 글귀다. 북극성은 언제나 거기 있다는 뜻이다. 전씨도 그런 사람 같다. 시인 신경림씨는 전씨가 우리에게 약초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며 ‘깊은 산 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눌러앉았으니 그는 50년 가까이 이곳 고향마을에서만 살고 있는 셈이다. 광복 전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947년께부터 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사회안전법에 연루돼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 후 봉화 밖으로 나가려면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조차 감시의 대상이 되자 그는 다른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사처럼 은둔해 농사꾼으로 살았다. 요즘엔 힘에 부쳐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없다. 논농사는 다른 사람에게 부치게 하고 있고, 밭농사도 300평 정도만 자신이 직접 짓고 있다. 그래도 쌀 이외의 대부분의 반찬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가을 고추는 얼마 전 뿌리째 뽑아뒀다. 콩 우엉 무 배추 따위도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산수유는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많이 열렸다.

    “자연이 곧 진리 그걸 모르는 기라”

    돗자리를 만들기 위해 올해 수확한 부들을 다듬고 있는 전우익씨

    사랑방 마루엔 예년보다 빨리 부들 돗자리틀을 차렸다. 올해는 밭 10여평에 부들을 심어 거뒀다. 이것을 3~4일 볕에, 이후엔 응달에 말려 겨우내 돗자리를 짜면 10입(장)은 거뜬하다. 아는 이들에게 완성품을 떠맡기고 “돈은 주고 싶은 대로 주소”라고 ‘엄포’를 놓으면 10만원도 주고 20만원도 준다.

    정원은 나무들로 넘쳐났다. 산수유나무 오갈피나무 단풍나무 엄나무 이팝나무 노각나무…. 고황에 들었다고 할 만큼 그는 나무에 깊이 빠져 있다. 나무를 기르게 된 계기를 묻자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나무는 그에게 ‘보약’이나 다름없다. 그는 그만큼 많은 것을 나무에게서 배웠다.

    “곡식은 입으로 들어가 육체를 살찌우지만, 나무는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니더.”

    이렇듯 나무에 애착을 갖다 보니 그는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이 나무에게는 목권(木權)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런 생각은 천지만물에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그것을 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생태적인 세계관으로 연결돼, 산의 산권, 강의 강권도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은 책 덜 읽고 산과 풀, 나무 보고 배우니더.”

    자의반 타의반 고향에 머물게 된 뒤로 “책이라도 읽지 않았으면 미쳤을 것”이라면서도, 노신의 책을 읽으면 “힘이 불끈불끈 솟았다”면서도, 책읽기보다는 자연과 벗하는 일상에서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에게 “책 속에 있는 것은 어차피 간접경험이고, 진리의 그림자”일 뿐이다.

    올해 2월에 내놓은 책 ‘사람이 뭔데’ 서문에는 ‘만날 해봤자 그놈의 소린 그놈의 소릴 수밖에 없는데 또 지껄였습니다’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책을 내놓은 것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만나면 참 좋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자만…’ 외에도 전씨는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1995) ‘사람이 뭔데’(2002)를 차례로 내놓았다. 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얻어온 이 책들 역시 농촌 삶에서 길어 올린 자연의 이치와 교훈이 시적인 필치로 담겨 있다.

    그를 만나면 배가 부르다. 농담 한 마디도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외상값을 다 받으면 장사가 당대에서 끝나지만 남겨놓으면 그 인심 때문에 2대, 3대까지 갑니더.” “마이너스가 중요하니더. 밥 먹고 설사도 하고 배도 아파야지 먹는 대로 살찌면 안 좋은 기라.” “곡선이 직선보다 한 수 위인 것은 축구의 바나나킥을 보면 알 수 있니더. 우리집 지을 때 사용된 굽은 나무는 곡선을 살려 써 모양새가 아름다운데 요새는 그런 나무 다 버리지요.”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우리에게 다양성이 없다는 것이었니더. 첨단은 많은데 고전은 없는 요즘 아이니껴.”

    담 너머 먼 산에 이내가 차오르고, 방이 식어갔다. 그는 다시 군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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