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5

2002.10.17

프랑스 노동시간 다시 늘려?

정부 ‘주35시간제 변경안’ 핫이슈… 시간 늘고 최저임금 상승, 노사 모두 ‘절반의 만족’

  • 파리= 민유기 통신원 YKMIN@aol.com

    입력2002-10-11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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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노동시간 다시 늘려?

    프랑스의 공장 노동자 중에는 시간외근무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 사무직에 비해 주 35시간 노동제에 찬성 비율이 낮은 편이다

    한국에서 주5일 근무제 실시 여부와 시기를 놓고 아직도 뚜렷한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요즘, 프랑스에서도 노동시간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주35시간 노동제에 대해 새롭게 내놓은 법률변경안이 노사 간의 서로 다른 해석을 낳으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997년 총선에서 집권한 사회당이 선거공약 이행 차원에서 주39시간 노동을 주35시간으로 단축했다. 당시 가장 큰 관심은 13%에 이르던 만성적 실업률을 어떻게 낮추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가 택한 방법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나눠 갖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부장관 마틴 오브리에 의해 준비돼 98년 11월과 2000년 1월 두 차례 입법으로 시행된 주35시간 노동은 노동시간 단축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삭감하지 않았고, 임금차액 역시 기업가가 아닌 국가가 부담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오브리법에 의해 2000년부터 모든 20인 이상 사업장에서 주35시간 노동이 실시됐고 올해 초부터는 20인 이하 모든 사업장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됐다.

    시라크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

    주35시간 노동제는 실제로 30만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한때 8%까지 떨어지게 했고, 여가생활 확대는 소비시장 활성화로 이어져 98년 이후 지난해까지 프랑스 경제가 연간 2∼3%대의 지속적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가들은 주35시간 노동이 주39시간 노동에 비해 보다 높은 생산성과 경영이익을 방해한다며 꾸준히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다. 특히 영세사업장이나 3D업종에서는 신규 직원 채용에 애를 먹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해왔다. 점원 한두 명을 고용해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크루아상과 바게트 등을 판매하는 동네 빵집의 경우 주35시간 노동이 비현실적이라며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며칠씩 문을 닫기도 했었다.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 이전의 임금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공적자금이 사용됨으로써 재정 압박 또한 늘어났다.

    프랑스 노동시간 다시 늘려?

    사회당 정권은 주35시간 노동제를 통해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여가를 보장했으나 정권교체 이후 주39시간 노동제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5월 대선과 총선에서 우파인 시라크가 재선에 성공하고 거의 모든 우파정당이 정치와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대통령여당연합’으로 통합해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주35시간 노동제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라크 대통령이 대선 기간에 ‘주35시간 노동제 법안이 지나치게 엄격해 노사 협상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있다’며 이 법을 좀더 유연하게 개정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이다. 7∼8월 바캉스 기간 동안 프랑스 경영인 총연합체인 ‘메데프’는 정부를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벌이며 주39시간 노동제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시라크 집권 2기의 초대 경제부장관에 임명된 프랑시스 메르는 프랑스 최대 철강산업체의 최고경영자 출신으로 과거에도 주35시간 노동제에 반대해온 인물이었다.



    노동과 사회문제장관 프랑스와 피용은 여름 바캉스가 막 끝난 9월 초 주35시간 노동제를 보완하는 법률안을 발표했다. 이 안은 9월 중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10월2일부터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이 법안이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주39시간 노동제로의 회귀일 수도 있고 단순히 주35시간 노동제의 보완일 수도 있어서 노동계나 사용자측 모두에게 100% 만족을 주지 못한 채 논란만 불러오고 있다.

    정부안은 주35시간 노동제 법안을 유지하되 현재 연간 추가노동 허용시간 130시간을 190시간으로 늘이는 것을 용인하며 노사 합의하에 190시간 내에서 추가노동시간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주39시간 노동제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1년 52주에서 법정유급휴가 기간인 5주를 뺀 47주의 실제 노동기간 동안 매주 4시간씩만 추가노동을 하게 되면 190시간에 육박하므로 결국은 주39시간 노동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법률안은 다양한 업종별 최저임금 기준을 2005년 7월까지 통일하면서 이때까지 최저임금을 평균 11.4% 인상하겠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한편 최저임금 인상과 그로 인한 노사 양측의 사회적 부담 감소를 위해 2006년까지 정부가 60억 유로(7조2000억원)를 추가 지출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정부안은 이처럼 절충적이다. 노동과 사회문제장관 피용은 이 법률안이 △경제계의 이해 보장 △추가노동을 통해 고수익을 원하는 일부 노동자의 요구 △노사협상의 자율성 보장 등 세 가지 현안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정쩡한 정부안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사용자측은 자신들의 요구대로 노동시간이 39시간으로 늘어날 가능성을 보장받게 된 것에는 만족하지만 동시에 최저임금이 인상되기 때문에 기업의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프랑스 노동시간 다시 늘려?

    프랑스 노동자들이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조나 좌파세력의 우려는 더 크다. 좌파는 10월 의회에서 우파 정부안을 꼼꼼히 검토, 비판하면서 정부안을 거부할 계획이다. 좌파세력은 우파 정부안이 노사 자율협상이란 명목으로 주35시간 노동을 주39시간으로 되돌리려 한다며 사회당의 최대 치적인 주35시간 노동제를 훼손하는 어떤 시도도 거부하겠다는 태세다. 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최저임금 인상은 환영하면서도 35시간 노동제의 수정에는 결사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외근무를 통해 좀더 높은 수입을 원하는 일반 노동자도 적지 않다는 데에 노조의 고민이 있다. 올해 초 한 여론조사에서는 임금생활자의 60%가 주35시간 노동제 법률에 찬성했지만, 업종별로는 큰 차이를 보여 사무직 노동자의 찬성비율은 매우 높았으나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장의 단순노동자들의 찬성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2000년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체 임금생활자의 10% 정도가 노사합의에 따라 법정 연간 추가노동시간인 130시간을 초과해 시간외근무를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회 논의 과정에서의 좌파의 반발과 이 기간 동안의 노조의 거리시위 등이 예견되고 있지만 저항의 강도는 95년 말 우파정권의 사회복지 정책 후퇴에 맞선 3개월 총파업 당시에는 훨씬 못 미칠 전망이다. 대선과 총선 당시의 공약을 이행하는 차원인데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정부의 수정안이 기업가들의 요구대로 주35시간 노동제에서 주39시간 노동제로 전면 후퇴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35시간제의 보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35시간 노동제 변경안에 대한 좌우파의 인식 차이는 프랑스 근대 좌우파 정치세력 간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 개입 방식을 둘러싼 인식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9세기 이래 프랑스 좌파는 사회적 현안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 개입을 지지하지만, 우파는 국가의 역할이 이해 관계자들의 자율적 합의에 따른 개혁을 돕는 것에 그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어느 순간에는 서로 대립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보완하면서 프랑스 정치를 발전시켜왔다.

    노동시간과 임금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이 한국의 근로자나 사용자들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한국과 프랑스가 다른 대목은 대립과 보완이라는 조화로운 정치 풍토가 한국에는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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