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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가고 ‘의혹’만 남았다

‘4억 달러’ 대북 지원 곁가지 ‘거짓말 게임’… “현대상선 계좌추적 돈 흐름 진실 밝혀야”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진실’은 가고 ‘의혹’만 남았다

‘진실’은 가고 ‘의혹’만 남았다

한나라당의 대북 비밀 지원 의혹 제기로 불거진 현대상선 4000억원 지원 공방은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고소로 인해 한광옥-엄낙용(위)-이근영(아래) 사이의 ‘거짓말 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한나라당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제기한 ‘4억 달러 대북(對北) 비밀지원 의혹’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가. 대북지원 의혹과 관련해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중 눈여겨볼 대목은 6월7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의 4000억원 당좌대월 승인 직후 지원금을 전액 인출했으며 이를 그해 반기보고서에 기록하면서 3000억원을 누락시켰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이 돈이 복잡한 자금세탁 과정을 통해 국가정보원으로 전달돼 국정원이 북한으로 송금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당과 정부, 현대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정치적 공방 끝에 국정감사가 끝나자 한나라당은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했고,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여권에서는 법적 대응을 공식 선언하고 나서 정치권의 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이 사건의 본질이 ‘대북송금 의혹’이냐‘계열사 편법지원 의혹’이냐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4000억원의 행방

한나라당은 당초 산은 대출금 4억 달러가 현대아산을 거쳐 북한으로 흘러갔다고 주장했으나, 다음날에는 국정원이 현대상선 대출금을 받아 북한이 관리하는 해외 계좌로 송금했다고 말을 바꿨다. 이와 관련, 현대상선의 2000년 반기보고서에는 산은으로부터 대출받은 4900억원 가운데 1000억원만 기재된것으로 밝혀져 3000억원의 행방을 둘러싸고 의혹이 증폭됐다. 2000년 말 사업보고서에 4900억원의 당좌대출 사용내역이 모두 기재된 것을 보면 6개월 동안 3000억원의 대출금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0년 3월 이후 6월 말까지 현대계열 지분을 매입하는 데 4000억원 이상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2000년 3월 ‘왕자의 난’ 이후 형제간 계열 분리 과정에서 정몽헌 회장이 자신의 계열사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산은 대출금을 전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4000억원의 실체가 이렇게 밝혀진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북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국책은행을 동원해 자금을 풀어주었다는 것 또한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애초 이 문제가 정상회담에 대한 대가 형식의 대북 직접 지원 의혹에서 출발할 것인 만큼 파괴력은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충식 서명이 빠진 이유

현대상선과 산업은행이 맺은 대출약정서에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서명이 빠져 있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상선 대주주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지시로 계열사 지원을 위한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김 전 사장이 반발하자 실무진이 김 전 사장을 배제하고 대출서류를 꾸몄을 가능성. 약정서에 서명이 빠진 것은 순전히 현대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가설로는 김 전 사장이 “우리는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으니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엄낙용 전 산은 총재의 증언은 설명할 길이 없어져버린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김보현 국정원 3차장이나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는 엄낙용 전 산은 총재의 주장처럼 정부 내 고위관계자들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작용해 김 전 사장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가 상장회사인 현대상선의 대출서류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흔적’이 남도록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겠느냐를 둘러싸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부가 직접 조달할 수 있는 비자금 성격의 돈이 아니라 산은의 현대 지원금을 동원해 북한에 지원하면서 이렇게 엉성하게 일처리했다는 것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4000억원 대북지원설이 다소 힘을 잃게 되는 대목이다.

‘진실’은 가고 ‘의혹’만 남았다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국감에서 “2000년 8월 산은 총재 취임 이후 현대상선 대출금의 실체를 알고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에게 상의했더니 이위원장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한광옥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화로 지시한 것이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근영 위원장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한광옥 전 실장도 엄낙용씨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혔다. 박상배 당시 산은 관리본부장도 자신의 전결로 대출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4억 달러 대북지원 의혹의 본질은 간 데 없고, 당사자들의 거짓말 공방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근영 위원장과 한광옥 전 실장, 여기에 맞서는 엄낙용 전 산은 총재 사이에 지리한 ‘거짓말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계좌추적 안 하나, 못 하나

정작 계좌추적을 통해 의혹을 규명할 ‘힘’을 가진 검찰이나 금감원 등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한광옥 전 비서실장의 명예훼손 고소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계좌추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반면 금감원의 계좌추적 작업은 ‘실명제법 위반’임을 내세워 애초 ‘불가(不可)’라는 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금융 전문가들은 국민적 의혹이 일고 있는 상황에 하루빨리 계좌추적을 통해 현대상선 자금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연스레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에 청와대 국정원 금감원 등의 핵심 관계자들이 관련된 대북지원 의혹 거짓말 공방은 당장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당사자들간의 엇갈린 증언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 계기가 당장 마련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더라도 ‘사법적’ 결론보다는 ‘정치적’ 공방이 더 유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 해결의 장기화를 예상케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현재로서는 미국에서 신병 치료를 마치는 대로 귀국하겠다고 밝힌 김충식 전 사장이 의혹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현대상선 대북지원 의혹을 둘러싼 공방이 김 전 사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어서 그가 귀국 시기를 조절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김 전 사장의 증언을 어떻게 끌어낼지도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주간동아 355호 (p16~18)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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