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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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분대장’의 아들 서울 오다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2-10-07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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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분대장’의 아들 서울 오다
    "아버님의 유언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고 사람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도전하라는 것이었죠.”

    ‘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옹이 숨을 거둔 지 꼭 1년이 되는 9월25일. 서울 도심 한복판인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장에서는 김옹을 기억하는 조촐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중국 옌볜인민출판사와 한국의 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 후원회가 공동주최한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 선집 김학철 문학편’ 출간기념회 행사. 책 출판을 겸해 그를 기억하는 중국 옌볜지역의 문학인들이 서울에 모여 추모행사를 연 것이다.

    이날 행사 참석을 위해 서울을 찾은 김옹의 아들 김해양씨(53)는 행사 내내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년 전 선친의 유언에 따라 병원 진료는 물론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김옹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김해양씨는 이날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두만강에 띄웠고 10여명의 지인을 제외하고는 일체 조문객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김학철 옹이 ‘로동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중 김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외금강 휴양소 소장으로 ‘좌천’당한 뒤 낳은 외아들이다. 간호사 출신의 어머니가 친정에서 김씨를 낳은 덕분에 김씨의 고향은 인천시 부평구다.

    김학철 옹은 지난해 9월25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옹은 당시 스스로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고 병원 진료마저 거부한 채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조선의용군 활동 기록을 복원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외아들 김씨를 포함한 가족들은 20여일 동안 단식한 뒤 조선의용군 시절의 모습으로 머리를 삭발한 채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김옹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옹은 관장을 통해 뱃속의 찌꺼기까지 모두 빼낸 뒤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김해양씨는 “아버님은 대문 앞에 ‘볼일이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閑人莫敲門)’고 써붙여 놓을 정도로 친구나 친척들까지도 멀리한 채 글쓰기에만 몰두했다”고 전했다. 김씨는 이날 추모행사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실 당시만 해도 충격에 휩싸여 슬픔밖에 남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버님의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해 할 일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김씨의 말을 듣고 김학철기념사업회를 적극 후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해양씨는 옌지[延吉]시 인민정부 경공업관리국에 근무하기도 했으며 5년 전부터는 옌지에 있는 옌볜공회간부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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