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9

2002.08.29

‘부산항 보물창고’ 소동은 사기극?

정충제씨 주장 ‘의문투성이’… 한글 포대 발견·탐사대원들 “보물 없다”

  • < 부산=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04-10-04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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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항 보물창고’ 소동은 사기극?
    ‘보물창고’의 발견인가? 또 하나의 사기극인가? 8월7일 주요 언론은 “일제시대 일본군이 450t 규모의 금괴를 숨겨놓은 어뢰공장과 연결된 지하통로를 발견했다”는 정충제씨(53)의 주장을 ‘부산항 지하에 어뢰공장 있다’ ‘일제 약탈 문화재 은닉처는 부산’ ‘부산항 지하에 금괴 450t 은닉’ 등의 제목으로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일부 언론은 발굴자 정씨의 인생 역정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부산항 지하에 일제가 만든 어뢰공장이 있다는 주장은 1960년대부터 가끔씩 언론 지면을 장식해 온 낡은 소재다. 그렇다면 수조원대의 보물이 저장된 어뢰공장의 입구를 발견했다는 정씨의 이번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보물 논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씨의 주장부터 들어봤다.

    “평생의 꿈을 이뤄 매우 기쁘다. 지하 어뢰공장엔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화차 14량분의 금괴(450t)와 금동불상 36좌, 중국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비취쌍불상을 비롯한 국보급 문화재를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미 해군에 의해 해상항로가 봉쇄당하자 부산항 요새에 숨겨둔 것이다.”

    일본군이 숨긴 수조원대 보물說

    ‘부산항 보물창고’ 소동은 사기극?
    정씨는 지난 3월 문현동 K건재상 부지에서 대형 굴착기를 동원해 직경 60㎝ 크기로 지하 16m 지점까지 파 내려가다 높이 3m, 폭 2.5m 크기의 지하통로를 발견했다. 그는 “언론에 공개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미뤄오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 보물을 노리고 배신한 사람들이 있어 언론에 전격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보물탐사팀’이 무인 수중카메라로 동굴 내부를 촬영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지하 4m 지점부터 물이 차 있었고 지하 16m 지점엔 인공 동굴로 추정되는 공간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화면상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대가 5층 높이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도 확인됐다. 테이프에서 편집, 조작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씨가 발견한 지하동굴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동굴을 만든 것일까. 정씨는 ‘일본이 부산항 지하에 어뢰공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며 부산 남구청의 토지대장 한 장을 보여줬다. 토지대장에 등재된 땅은 1934년 이후 일본목재주식회사 소유에서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3일 조선총독부로 소유권이 이전돼 있었다.

    정씨가 어뢰공장 입구를 발견한 문현동 일대는 일본군 군수창고와 기차역이 있었던 곳이다. 지하동굴의 발견, 일제 군수창고, 군사용 역, 부산항, 토지대장… . 정씨의 주장은 언뜻 보면 모두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하동굴 속으로 사람이 들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정씨는 “장비를 확보하는 대로 사람을 내려보내 내부를 자세하게 촬영해 곧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다. 배신자들이 생겨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항 보물창고’ 소동은 사기극?
    취재팀은 정씨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무인카메라로 동굴 내부를 촬영한 화면을 느린 속도로 정밀하게 관찰했다. 그런데 동굴에 쌓여 있는 포대 가운데 한글이 쓰여진 포대 1개가 화면에 나타났다. 일본이 만든 어뢰공장 출입구에 한글이 쓰여진 포대가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취재팀은 정씨가 ‘배신자’라고 지목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지난 3월 보물탐사팀에 합류해 정씨와 함께 지하동굴을 탐사한 채상훈씨(47)가 그중 한 명. 동굴 내부 화면을 무인카메라로 찍은 장본인으로 본격적인 탐사작업을 총괄 지휘했다. 채씨는 후배 잠수부를 동굴로 내려보내 내부를 촬영한 또 다른 비디오 테이프를 공개했다. 채씨가 공개한 필름엔 동굴 내부가 자세히 찍혀 있었다. 수백 개의 포대가 쌓여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포대에 ‘89년 검’ ‘××소금’, ‘공산품 표시’ 등의 한글이 적혀 있었다. 채씨는 “지하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포대 더미는 굴을 뚫는 과정에서 나온 돌덩이를 쌓아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결국 채씨의 주장에 따르면 정씨는 누군가 보물을 찾기 위해 파놓은 인공 동굴을 어뢰공장의 출입구라고 주장한 셈이다. 채씨는 “내가 탐사를 맡았고 이곳엔 보물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뒤 정씨에게도 얘기했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언론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언론사들이 정씨의 말만 믿고 직접 탐사를 맡은 사람에겐 전화 한 통 없이 기사를 쓴 것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60년대부터 탐사했지만 실패한 곳

    그렇다면 정씨가 발견한 인공 동굴은 누가 만든 것일까. ‘부산항 보물’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전 동아대 교수 구모씨와 매장물 탐사 전문가인 신모씨가 보물 발굴에 나섰다 실패했다. 1990년대 중반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박모씨가 이번 정씨가 입구를 발견했다는 지점과 거의 일치하는 곳에서 어뢰공장 입구를 찾기 위해 땅굴을 뚫기도 했다.

    박씨는 80년대 중반부터 이 지역에서 보물 탐사를 해왔는데 90년대 중반 동업자를 한 사람 만난다. 그 동업자가 바로 정충제씨다. 박씨와 정씨는 93년 경부터 5년 동안 함께 발굴작업을 했는데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씨는 “박씨가 수억을 쏟아부어 지하 공간을 샅샅이 뒤졌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면서 “내가 지적한 지점을 탐사하지 않고 엉뚱한 곳만 고집해 결별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3월까지 정씨와 5년 동안 작업을 함께 해온 김성태씨는 “정씨가 자신이 탐사할 때 뚫은 동굴에 수직으로 구멍을 내놓고, 어뢰공장 입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나현철씨(53)도 “박씨, 정씨와 함께 작업을 했다”며 “우리가 과거에 뚫어놓은 동굴을 두고 어뢰공장 입구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박씨와 정씨가 90년대 중반 이후 함께 작업하던 지역과 이번에 동굴 입구가 발견된 지점은 거의 일치한다. 결국 포대가 쌓여 있는 동굴 입구는 박씨 혹은 박씨와 정씨가 함께 판 동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씨는 “과거엔 20여m 지점에서 동굴을 굴착했고 이번엔 16m 지점에서 굴착했기 때문에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박씨와 일은 함께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땅 밑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씨의 주장에 솔깃한 보물전문가 백준흠씨(45) 등이 중심이 돼 지난 4월 ‘포세이돈 살베지’란 부산항 보물 탐사 회사가 만들어졌고, 이 회사의 주주인 김모씨(50)는 7억여원을 들여 지하통로 주변의 땅을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보물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씨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결국 정씨의 말을 믿고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정씨는 “배신자들이 몰래 보물을 빼내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따돌리려고 보물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정씨가 발견했다는 ‘지하통로’가 부산항 지하 어뢰공장의 입구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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