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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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틀에 맞춘 스타일 거부 나만의 개성 추구 … 실용적인 옷, 자연친화적 고급 소재 선호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0-29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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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최근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이 보고 듣게 되는 단어인 ‘보보스’(Bobos)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펴낸 책 ‘보보스 인 파라다이스’(Bobos in Paradise)를 통해 소개된 신조어로 부르주아(Bourgeois)와 보헤미안(Bohemian)의 합성어다. 이는 부르주아의 야망과 성공, 보헤미안의 반항과 창조성이라는 이중적 성향을 가진 디지털 시대의 신흥 귀족을 일컫는 말. 지금 이들은 광고, 패션 등 대중문화나 소비문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포스코건설이 최근 내놓은 아파트 ‘the 샤ㅍ(#)’의 광고에는 홀로 유람선을 타고 여유롭게 망망대해를 감상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 위로 ‘1캐럿의 다이아몬드보다 1g의 햇살이 더 소중하다’는 광고 카피가 흐른다. 어느 정도 부의 성취로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되어 인생을 즐기는 보보스족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광고다.

    대우증권이 지난해부터 내보내고 있는 고소득 전문직 타깃의 자산종합관리 상품 ‘플랜마스터’ 광고 역시 재즈 연주, 영화 출연 등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변호사와 치과의사 등이 등장한다.

    보보스의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KTF의 기업PR ‘넥타이와 청바지’편과 정우성 고소영이 등장하는 삼성카드 광고. KTF 광고에 등장하는 젊은 사장은 세단에 정장 슈트 대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청바지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한다. 철없는 젊은이처럼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거리를 쌩쌩 달릴 때 사람들은 그가 커다란 회사를 운영하는 전문경영인(CEO)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한편 삼성카드 광고 속의 정우성은 ‘모두에게 인정받을 만큼 능력 있지만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 여기고, 여자를 사랑할 줄도 아는’ 남자다. 양복에 스니커즈를 신고 배낭을 멘 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식료품점에서 과일과 바게트빵 몇 개를 고른 뒤 카드로 소액결제를 한다. 그는 사회적 체면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을,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의 멋과 행복을 위해 사는 전형적인 보보스족이다. 여성들은 이 광고 속의 정우성을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꼽는다.



    “요즘 여성들은 함께 삶을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남자친구, 남편을 원한다. 특히 패션에 민감한 여성들은 패션 트렌드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이 광고 속 남성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여자와닷컴 패션콘텐츠팀 박선영 PD)

    광고 주인공들의 패션을 보면 보보스적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정우성은 캘빈클라인의 스리버튼 슈트에 티파니 블루 색상의 타이(던힐 제품)를 매고, 프라다의 배낭과 폴로의 스니커즈를 착용했다. 그가 타고 있는 자전거는 벤츠 제품.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돈 들인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한눈에 어디 제품인지 알 수 있는 로고나 문양이 드러나 있지 않고, 전형적인 명품 스타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1980년대의 여피족이 고가 위주의 정형화된 패션을 추구했다면, 21세기의 보보스족은 자기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상표나 가격은 중요하지 않다.

    패션평론가 간호석씨는 전 세계 보보스의 애용품인 테크노마린 시계를 예로 들어 보보스 패션을 설명한다. “이 시계는 슬쩍 보기엔 고무밴드로 된 값싼 캐주얼 시계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레임 안에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겉으로 너무 부티나 보이지 않는 데다 수심 200m에서도 방수가 될 만큼 실용적이다. 이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살 수 있는 프라다나 구치 제품보다는 일일이 손으로 짠 수백만원짜리 페루산 스웨터를 갖고 싶어한다.”

    한국에서 보보스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30, 40대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을 보보스적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는 계층으로 규정, 이들의 패션 스타일을 파악하고 공략하기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정장을 입을 때도 부담 없고 캐주얼한 분위기를 선호한다. 이에 따라 전체 남성복 시장 규모 3조4000억원(올해 기준) 가운데 캐릭터 정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1조원 선에 육박한다. 소재는 고급화하면서 옷의 분위기는 한층 자유로워진 것이 특징이다.” LG패션의 방유정 실장은 올해 남성복 정장의 경향을 ‘더욱 가볍고 고급스럽게’라는 말로 설명한다.

    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불과 2년 전에 최고급 소재로 각광받던 130수∼150수 소재는 기본 소재처럼 대중화되었고, 반면 구김이나 먼지가 잘 생기지 않는 소재로 활동성을 높인 제품이 인기. 색상 역시 감색과 회색 등 기본색 일색에서 벗어나 핑크, 민트, 살구색 등 감각적인 색상을 도입한 신사복이 많이 눈에 띈다.

    올해 남성복 해외 컬렉션뿐 아니라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의 옷에서도 이전에 비해 대담하고 자유로운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을 발견할 수 있다. 민속풍의 페이즐리 무늬와 물방울 무늬로 히피적 감성을 녹인 패션과 남성들에게 낯선 7부나 9부 바지 정장도 등장했다.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듯 오래된 느낌의 소재를 사용해 꾸미지 않은 듯한 멋을 표현한 작품이 많은 것도 보보스족의 감성을 겨낭한 것으로 보인다. 캐주얼의 경우에도 매끄러운 합성섬유보다는 무명의 까칠한 질감을 그대로 살린 것과 쉽게 구겨지는 면 셔츠, 털이 보풀보풀 살아난 양털 스웨터 등이 많다.

    패션이 ‘보보스족’을 만났을 때
    때와 장소에 따라 캐주얼하게 또는 비즈니스 웨어로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을 좋아하고,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고급 소재를 선호하는 것, 정장 슈트에 스니커즈를 매치시키는 퓨전 감각 등이 패션으로 드러나는 보보스 스타일이다.

    “보보스족이 즐기는 스타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보보스의 특징이 정형화된 스타일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의 ‘명품족’과는 확실히 다른 취향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명 브랜드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거나 얘깃거리가 풍부한 상품을 선택하고 싶어한다.”(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

    전문가들이 보는 보보스 패션은 ‘문화가 패션에 이어진 사례’다.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다른 차원의 고급스러운 패션을 추구하고, 실용성에 주안점을 두면서 품위와 자유로운 개성을 조화시키고 싶어하는 보보스들의 욕구. 업체들은 이러한 욕구가 우리의 패션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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