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 귀환한 임특사의 ‘3박4일 평양 체류기’에 대해 통일부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민족공조 하자고 해놓고 왜 반북 압살정책을 펴느냐. 민족공조인지 외세공조인지 양자택일하라”는 북측의 초반 공세에 우리측 대표단이 적지 않게 시달렸다는 얘기 끝에 나온 말이었다.
남북관계 물꼬 … 북미 대화도 재개
이번 회담의 핵심은 이 말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임특사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부터 “한반도 긴장을 풀기 위한 현안을 집중 협의하겠다”고 밝혔고, 북측 역시 “민족 앞에 닥쳐온 엄중한 사태”를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말해 이번 특사회담의 무게중심은 남북관계 복원에 앞서 임특사가 표현한 대로 ‘2003년 안보위기설’ 잠재우기에 있었고, 민족공조와 외세공조 논쟁은 이와 관련한 양측의 입장 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2003년 안보위기설’에 대해서는 본지 324호 참조).
이런 맥락에서 이번 특사 방북의 산물인 공동보도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모두 6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보도문에서 1항이 안보위기와 관련된 항목이라면 나머지 5개 항은 남북관계 복원에 관한 세부 사항들이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쌍방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본 정신에 부합되게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긴장 상태가 조성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1항)라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틀간 지루한 공방을 벌인 셈이 됐다. 임특사는 또 북측이 북미 대화를 재개하는 첫 단추로 잭 프리처드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의 방북을 수용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가져왔다.
관변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이번 특사회담에 임한 우리측의 기본 입장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특사를 통해 지난 2월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은 김대통령으로서는 과거 어느 정상회담보다 고민이 많은 회담이었다. 김대통령은 그때까지 대북 강경자세를 고수하고 있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납득시키고 북미간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핵과 대량살상무기(WMD) 테러 등의 이슈를 선점하는 등의 방법으로 햇볕정책의 당위성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런 토대 위에서 김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정체됐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 결과적으로 북미관계에도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는 점을 김위원장에게 설득했을 것이다.”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을 정리해 보면 △북미관계가 개선되거나 최소한 북미 대화가 재개되지 않는 한 내년 혹은 올 하반기부터 한반도는 심각한 위기국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사찰 수용 요구가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대표적 요인이다 △정부로선 당연히 사태가 그렇게 발전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북측도 기본적으로는 미국과 대립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결론은 정부가 나서서 북측에 미국과 초보적인 대화라도 시작하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아울러 북측이 지금까지 고수해 온 ‘선미후남’(先美後南) 전략을 바꿔 일단 남북대화를 진척시켜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임특사의 방북 관련 상황을 읽는 ‘일반론’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우리 정부의 ‘숨겨진 의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부는 북미관계가 위기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측이 예의 ‘벼랑끝 전략’을 고수할 경우의 얘기다. 미국이 9·11 테러를 겪은 후 달라졌고, 북측 역시 그런 미국을 상대로 벼랑끝 전략을 고수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정부가 우려하는 ‘2003년 안보위기설’은 말 그대로 ‘설’(說)로 끝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안보위기설로 이득을 얻는 쪽은 현 집권세력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안보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다가오는 연말 선거에서 호재가 되리라는 것이다.”
임특사 방북으로 일단 수면 위로 떠오른 ‘안보위기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중 이산가족 사업과 경협추진위 등은 양측이 별 무리 없이 추진할 수 있는 사안들.
그러나 이번에 재차 합의했음에도 성사 여부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는 항목도 상당수다. 경의선 연결, 개성공단 건설, 군사당국자 회담 등이 그것이며, 정부도 이 항목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북측의 이 같은 공세에 우리측은 “한·미·일 공조는 결코 반북 압살정책이 아니라 북측이 미·일과 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공조다. 따라서 민족공조와 외세공조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는 논리로 맞섰다고 한다.
일견 이 문제를 놓고 남북 양측이 치열하게 붙은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론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한반도 문제가 남북과 국제라는 양 축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본질상 남북이라는 축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정책이다. 그렇게 보면 이번 특사회담 역시 과거의 흐름과 맥이 일치한다.
“쌍방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라의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풀어 나가기 위한…”으로 시작하는 공동보도문 2항의 내용처럼 ‘엄중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또 한 번의 민족공조가 이번 특사회담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330호 (p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