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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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돈 쓰는 영국 왕실 폐지해?

오는 6월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 … “엄청난 특권-혈세 낭비” 찬반 논쟁 되풀이

  • < 안병억/ 런던 통신원 > anpye@hanmail.net

    입력2004-10-18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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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펑펑 돈 쓰는 영국 왕실 폐지해?
    지난 2월9일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졌다. BBC 방송을 비롯한 영국 주요 언론은 이 소식을 속보로 전하며 마거릿 공주의 생애와 왕실 표정을 계속 보도했다. 버킹엄 궁전을 관람하던 중년의 영국 여성은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인인 필자에게는 영국 인들의 이런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사실 이 같은 야단법석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다. 한 영국인은 라디오의 청취자 프로그램을 통해 왜 마거릿 공주의 사망소식을 하루종일 보도하느냐며 언론이 대중의 뉴스 선택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99 회계연도 세금 461억원 사용

    펑펑 돈 쓰는 영국 왕실 폐지해?
    이보다 사흘 앞선 2월6일은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었다. 며칠 후 마거릿공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국 전역에는 축하보다 추모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조용한 가운데 왕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민주주의 시대에 세습제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과 자랑스런 전통이라는 견해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왕실을 현실에 맞게 고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왕정 폐지론자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시대에 세습왕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 왕실은 엄청난 특권을 지니고 있으며 혈세 낭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1999년 회계연도(1999년 4월1일~2000년 3월31일)에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 등 해외 순방에 930만 파운드(약176억원), 왕실 관리비와 인건비 등으로 1500만 파운드(285억원)를 썼다. 여왕의 공식 경비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자그마치 461억원의 세금이 왕실로 들어간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인 필립 공과 101세가 된 여왕의 어머니에게도 공식 업무 수행의 지원 명목으로 각각 50만 파운드가 매년 지급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세금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여왕은 1993년에야 소득세를 내기 시작했다.



    펑펑 돈 쓰는 영국 왕실 폐지해?
    왕실 반대론자들은 왕실에 낭비되는 돈을 다른 분야, 예컨대 사회복지에 쓰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벨기에나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다른 나라의 왕실에 비해 영국 왕실은 가장 화려하고 가장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왕정 지지자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왕정이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기구라는 점을 들고 있다. 영국의 자랑스런 제도 가운데 하나를 단순히 경제적 잣대로 평가해 폐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아직도 여왕은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 통합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거론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영연방으로 재편되면서 여왕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주요 영연방 국가의 원수도 겸한다. 상당수의 영국인들은 왕실의 폐지는 곧 자랑스런 영국 역사의 종말이라고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 정부의 공식 명칭은 ‘여왕 폐하 정부’ (Her Majesty’s Government)이며 해군은 ‘왕실 해군’(Royal Navy)이다. 영어 단어 하나하나에 끼친 영향까지 왕실의 흔적은 너무도 크다.

    왕실에 대한 찬반 논쟁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영국의 정치권도 이 문제로 자주 논쟁을 벌이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최근 의회에서 왕정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자 자신을 “열렬한 왕정지지자”라고 규정했다. 보수적인 성향의 의원들은 왕실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애국자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이 최근 초당파적으로 왕정폐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의회에서 왕정폐지의 공개적 거론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모임은 비밀리에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펑펑 돈 쓰는 영국 왕실 폐지해?
    왕정 자체는 지지하되 왕정을 현실에 맞게 고치자는 움직임도 있다. 지난해 말 여당인 노동당의 케빈 맥나마라 의원이 하원에서 왕위 계승법을 개정하자는 의견을 제기해 적잖은 의원들의 호응을 얻었다. 노동당의 지지가 없으면 법안화될 가능성은 없지만 어쨌든 의회에서 이 문제가 공식 제기됐다는 점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1700년에 제정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영국 왕은 성공회 신자여야만 한다. 16세기 중반 헨리 8세가 교황과 종교분쟁을 벌이면서 영국은 로마 가톨릭과 분리, 성공회 국가로 변모했다. 이후 여러 차례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고 이때마다 왕위 계승자의 종교가 문제 되면서 성공회 신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역사적 유산이지만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고 있는 이 법은 종교를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현대의 법 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회의 이런 움직임에 일부 언론도 가세했다.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해부터 활자로 왕정폐지를 주장하면 반란죄로 규정하고 있는 1848년의 반란법을 개정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처음 이 운동을 전개할 때 이 신문사는 처벌이 두려워 법무부에 질의를 제기해 처벌하지 않겠다는 비공식적인 답변을 얻었다. 이에 따라 ‘가디언’지는 반란법 개정 운동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오는 6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가 영국 전역에서 열린다(여왕은 52년 2월 선왕인 조지 6세가 사망함에 따라 여왕이 되었고, 이듬해인 53년 6월에 정식 대관식을 가졌다). 각 자치단체가 사정에 맞게 행사를 개최하고 여왕은 영국의 주요 도시를 순방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영국인들은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보다 2002 월드컵에 더 관심이 많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 왕실과 총리실이 나서 50주년 기념식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1977년 열렸던 여왕의 즉위 25주년 기념식과 상당히 대비되는 상황이다. 당시에는 영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기념행사가 열렸고 시민들의 호응도 열광적이었다.

    보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30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24%의 응답자만이 왕실폐지를 지지했다. 대신 절반이 넘는 53%가 왕실의 존속은 지지하되 좀더 시민에게 친근하고 민주적인 왕실을 원한다고 답했다. 50주년 기념식에 별 관심이 없다는 대답도 절반에 달했다. 역시 절반 가까운 시민들은 영국 왕실이 돈을 너무 많이 쓰고 화려하다며 네덜란드 왕실과 같이 검소하고 시민에게 친근한 왕실이 좋다고 대답했다.

    비록 보수적이고 변화에 둔감한 영국 국민들이지만 왕실의 변화를 바라는 대중의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다. 별다른 현실감각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영국 왕실이 앞으로 국민의 요구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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