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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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현대판 바벨탑 될라

동구권 확대 앞두고 전문 통·번역관 태부족 … 각종 회의 진행 차질 불 보듯

  • < 안병억/ 런던 통신원 > anpye@hanmail.net

    입력2004-10-18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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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연합(EU)은 늦어도 2004년까지 동구권 국가 중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4개 국가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예정이다. 이어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6개 중·동부 유럽 국가도 유럽연합 회원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럴 경우 유럽연합 회원국 수는 현재의 15개에서 25개 국가로 늘어난다.

    EU의 급속한 확대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EU 예산으로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공동농업정책의 경우를 보자. 현 회원국들과 비교하면 동구권 후보 국가의 농민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현재의 보조금 액수를 동구권 국가들에도 유지하려면 공동농업정책의 예산이 너무 많아져 다른 정책과 재원배분상 충돌하게 된다. 때문에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EU에 가입해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야 농업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개별 정책 외에도 다른 문제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전문 통·번역관의 부족이 심각한 문제다. 전문 통·번역사 양성이 단기간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 관계당국은 더욱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현재 15개 EU 회원국의 공식언어는 11개다. 모든 공식문서와 회의는 11개 언어로 번역·통역되어야 한다. 영어가 독일어로, 독일어가 덴마크어로, 핀란드어가 프랑스어로, 혹은 영어로 등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해 보면 11개 언어의 가능한 통역 조합 수는 110개에 달한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등 4개국 언어의 통·번역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슬로베니아의 경우 20명의 전문 통·번역관이 있지만 대개 영어와 독일어 통역사다. 헝가리 역시 보유하고 있는 38명의 통·번역사 중 대다수가 프랑스어와 영어만 통역할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 통역사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개 후보국과 EU 집행위원회, 각료 이사회 간에는 가입조건의 충족 여부나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수십 차례의 회의가 예정돼 있다. 당장 이 회의중에 헝가리어를 스웨덴어로, 혹은 핀란드어를 헝가리어로 통·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 수 없이 영어나 프랑스어로 통역한 후 헝가리어로 다시 통역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중역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브뤼셀에 있는 EU 집행위원회에 근무하는 인력은 2만100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통·번역에 종사하는 인력은 3100명 정도. 전체 인력의 15%가 통·번역사다. EU에서는 1년에 평균 1만1000회의 공식 회의가 열리며 하루 722명의 통역관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연간 통역비용은 1억6300만 유로(약 1870억원), 번역비용은 5억2300만 유로(약 6000억원)에 달했다.

    경제적 비용만 따진다면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 많이 쓰이는 언어만 공용어로 쓰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이는 단순히 경제논리로만 따질 수 없는 문제다. 예컨대 헝가리어가 EU의 공용어로 쓰이지 않는다면 헝가리 국민이 EU 가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EU 집행위원회 수석 통역사인 이언 앤더슨은 “EU의 1년 예산이 900억 유로(100조원)임을 감안할 때 통·번역 비용은 0.78%에 불과하다”며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전문 통·번역관의 확충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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