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2002.03.07

“언제 봄 오나”… 햇볕정책 ‘시련의 계절’

미국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뚜렷한 시각차 … 향후 ‘對北정책’ 밀어붙일 가능성 높아

  • < 송문홍/ 동아일보 논설위원 >songmh@donga.com

    입력2004-10-18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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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봄 오나”… 햇볕정책 ‘시련의 계절’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짧은 방한 기간중 많은 말을 남겼다. 특히 비무장지대(DMZ)에서 불과 100m 떨어진 미군 초소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북쪽 건너편 ‘평화박물관’을 바라보는 부시 대통령에게 미군 부대장이 “저곳에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 북한군이 사용했던 도끼가 전시돼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내가 저들을 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혀 잘못이 아니었군(No wonder I think they’re evil)”이라고 했다. 또 기자들이 “북한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뜬금없이 “우리는 준비가 돼 있다(We’re ready)”고 했다.

    ‘당근’보다는 ‘채찍’에 더 비중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비무장지대를 처음 방문해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현실을 직접 목도한 외국 정치지도자들이 으레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을 감안하면 “우리(한미연합전력)는 북한의 어떤 도발도 막아낼 준비가 돼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방한에서 북한 지도층에 대한 강한 불신을 여러 차례 표출했다. 또 북한 지도층과 북한 주민을 분리해 주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지도층이 문제라는 인식도 내비쳤다. 그렇다면 부시 대통령이 말한 ‘준비’란, 북한의 도발에 대한 방어적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의 현 상황을 좀더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측이나 미국이 대북정책의 목표로 흔히 내세우는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변화’란 미국 입장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북한이 자유시장제도를 수용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냉전이 끝난 1990년대 이래 미국이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내세운 ‘개입(engagement)과 확산(enlargement) 전략’이 바로 그 같은 논리의 일차적 배경이다. 개입과 확산 전략은 미국의 초당파적 외교 전략이며 그런 점에서 북한의 체제 전환은 미국의 초당파적 대북정책의 목표가 되어왔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을 뿐이다. 공화당의 방법론이 민주당보다 한결 공격적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보면 부시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전임 민주당 정부와 현 공화당 정부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한 차례 북한과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은 후 일관되게 북한의 요구를 수용했다. 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고, 2000년 하반기에 있었던 북미 공동 코뮤니케 합의 등 일련의 북미관계 진전이 그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공화당 부시 행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전임자가 쌓아놓은 ‘공든 탑’을 모조리 무시했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s)-북한이 핵 동결과 미사일 수출 중단 및 시험발사 중지 등을 사안별로 세분화해 협상 이득을 극대화하는 전술-에 말려들었다고 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 재래식무기 문제를 포함한 모든 현안을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미국측은 지난해 6월 초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북한과 조건 없는 대화에 응하겠다”는 기본방침을 밝혔지만, 원점에서부터 다시 협상을 시작해야 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 9·11 테러사건은 북한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외교정책 전체를 반테러 차원에서 접근했고 한반도 문제 역시 반테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과거 북미간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에 관계없이 현재 미국이 새삼스레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요인들(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무기 등)에 대해 북한이 먼저 모종의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외교 스타일 면에서도 과거에 일정 부분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북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미국의 변화된 정책에 북한이 따라서 변화할 것을 요구하는 등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부시 대통령이 올해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고 새삼스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부시 대통령 방한에 대해 국내외 언론은 일제히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부시 대통령의 말을 큰 제목으로 뽑고 한미 정상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 등을 ‘대화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지만,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미국이 21세기 잠재적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북한을 선제 공격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무엇보다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남한의 의사를 듣지 않고 그런 일을 벌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사건 이후 한국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나름대로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온 미국은, 앞으로도 사안마다 한국과 타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미국은 ‘당근’보다 ‘채찍’에 더 비중을 둘 게 분명하다. 문제는 이로써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기로에 섰다는 점이다. 대북정책에 관한 한 전임 클린턴 행정부는 한국의 뜻을 존중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국의 의사를 참고만 할 뿐 실제 정책은 미국 뜻대로 밀고 나가는 상황을 자주 목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을 보는 한미 양국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평가하는 시각차라 할 수 있다. 즉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현재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고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반면, 미국은 북한의 변화가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변화가 있다 해도 전술적 차원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판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시 행정부는 햇볕정책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향후 한반도 정세는 북한이 미국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 좌우될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핵과 미사일, 재래식무기 등에 관한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임자와 협상 스타일이 전혀 다른 부시 행정부를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은 남북관계에서 모종의 돌파구를 열어 두면서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떻게든 미국과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기간으로 설정한 2003년이 다가오고 있고, 경수로 핵심부품의 북한 반입을 위한 선결조건으로서 핵 사찰 준비 문제가 조만간 대두되는 등 북한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레이건 대통령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지만 대화로 소련 문제를 해결했다”며 북한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써야 한다고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메모까지 해가면서 “대단히 좋은 말씀”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적인 냉전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래로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의 주도하에 다각적인 대소련 비밀공작을 펼친 결과였음이 후세 사가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레이건 일화’를 예로 든 김대통령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세력이 그 시절 소련 및 동구권의 체제전환 작업에 참여했던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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