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5

2001.12.27

자고 나면 리스트 … 하얗게 질린 여의도

‘진승현 리스트’ 둘러싸고 권력 내부 파워게임-음모설 … ‘몸통’ 안 밝혀진 채 의혹만 눈덩이

  •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12-13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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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 나면 리스트 … 하얗게 질린 여의도
    로비 리스트에는 30여명의 정·관계 인사가 있고 로비 대상 리스트에는 50명이 포함돼 있다.” ‘진승현 게이트’가 확산일로를 걷던 지난 12월16일, 한나라당 이재오 총무는 강경한 어조로 진승현 리스트를 치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때를 같이해 권력형비리진상조사특위(위원장 정형근)도 재가동하는 등 전투 의지를 내비쳤다. 대변인 논평으로만 일관하며 탐색전을 벌인 기존 입장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나라당의 변화는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한 당직자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때 진승현 리스트에 한나라당 인사가 다수 포함됐다는 설과 사정설이 겹쳐 긴장했지만 자체 조사한 결과 포섭 대상에 오른 인사는 있지만 실제 돈 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한나라당의 긴장감을 풀어준 것은 바로 리스트의 실체였음을 알 수 있는 발언이다. 한 측근은 한나라당에 리스트의 실체를 던져 준 대상으로 사정기관을 꼽았다. 그만큼 신뢰할 만하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고 이 자신감은 정치권을 곧바로 ‘리스트 정국’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분위기가 이어진 다음날(17일) 민주당은 출처 불명의 한 장짜리 괴문서로 당이 발칵 뒤집혔다. ‘지뢰매설 현황’이란 제목의 이 문건은 진승현씨에게 자금을 받은 여야 의원 17명의 실명을 담고 있다. 특정 정파를 음해하려는 음모라는 반론이 없지 않지만, 리스트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당내 인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요소를 골고루 갖췄다.



    주로 동교동 구파 인사들의 명단이 담긴 이 문서가 공개되자 당사자들은 “당내 특정세력의 음모”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름이 거명된 한 관계자는 “우리는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이 누구와 친한지 알고 있다”며 H의원 쪽을 배후로 지목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지목된 다른 세력이 발끈했다. “최택곤이 누구 사람이냐”고 분통을 터뜨리며 맞비난에 나선 것. 출처도 알 수 없는 괴문서 리스트가 민주당을 온통 음모론으로, 권력 암투로 내몬 것이다. 한 당직자는 “진승현 리스트가 공개되기도 전에 당이 허물어질 것 같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얼굴 없는 진승현 리스트의 파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정치권에 나도는 진승현 리스트는 정형화된 틀이 없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형태나 내용이 달라진다. 지난해 총선을 전후해 정치권에 선거자금을 뿌린 것과 검찰 수사를 대비해 관계 요로에 로비 자금을 뿌린 리스트 등이 우선 거론된다. 이 리스트는 로비를 시도한 사람에 따라 진승현 리스트와 김은성 리스트, 그리고 제3의 리스트 등으로 ‘가지’를 친다. 여권 핵심인사들의 암투에 의해 한두 개씩 터지는 사안까지 감안하면 진승현 리스트는 훨씬 많아진다.

    지난해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김재환 전 MCI 회장과 진승현씨 및 그의 아버지 진수학씨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며 만들었다는 것이 이른바 ‘진승현 리스트’다. 검찰은 사건 초기 이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이 올해 초 김재환씨를 폭행한 것과 관련, “이 리스트를 뺏기 위한 폭행”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 리스트에 정·관계 인사 10여명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은성씨가 만든 ‘리스트’도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김씨가 진씨 로비를 총지휘하며 검찰 수사에 대비한 마지막 수단으로 로비 대상자 명단을 작성, 김재환씨와 함께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리스트다. 대상은 물론 로비 내역, 액수 전달 방법 및 전달 시기 등을 적고 진씨의 손도장까지 찍게 했다는 등 구체적 상황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은성 리스트는 진승현 리스트에 비해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 자체를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주변에서는 리스트의 존재를 믿는 분위기다. 검찰은 최근 “보이지 않는 세력이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려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며 그 핵심세력으로 김 전 차장을 지목하고 있다. 신 전 차관 1억 수뢰설, 허인회 동대문을 지구당위원장의 후원금 5000만원 수수 사실, 김홍일 의원의 돈봉투가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됐다는 등의 내용은 김은성 리스트가 진원지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김씨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여권 내부의 파워게임과 음모설이 깔려 있다. 김씨가 동교동계 구파와 가깝지만 정치적 협상 여지를 만들기 위해 동교동 구파 및 여권 실세들을 넣고 빼는 ‘편집’ 작업을 거쳤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진승현 리스트에 과연 누가 포함돼 있느냐는 점이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민주당 386부터 여권 고위인사의 친인척과 실세 및 특정학교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많이 올랐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한나라당 이총무의 한 측근은 “아직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거물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허인회 위원장 등 지금까지 거론된 인사들은 ‘꼬리 중 꼬리’라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만약 누군가 리스트를 의도적으로 흘리고 있다면 몸통은 여전히 남겨둔 채 사정당국과 협상하려 할 것이라는 분석도 곁들여진다.

    자연 관심은 신광옥 전 법무차관,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 위에 누가 또 있느냐는 것으로 모아진다. 리스트의 증폭 과정으로 보아 그 이상의 몸통이 나와야 협상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여권의 긴장감은 더욱 커진다. 수사정보가 노출되고 그 배경에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들간의 암투가 자리잡고 있지만 이를 제어해야 할 청와대와 여권 지도부는 통제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상자기사 참조). 진승현 리스트는 고삐 풀린 채 그 틈을 헤집고 다닌다. 이래저래 진승현 리스트는 엄동설한의 정치권을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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