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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김혜자와 ‘셜리 발렌타인’

“배우는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거야”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배우는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거야”

“배우는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거야”
100회를 넘긴 김혜자의 ‘셜리 발렌타인’을 보러 정동을 찾은 날은 늦가을의 한가운데쯤인 10월 마지막 날이었다. 정동길에 차오른 낙엽을 밟으며 모여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주부였다. 오랜만에 입은 것이 분명한, 어색한 정장 차림의 여자들과 소극장 무대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막이 오르기 직전의 암전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 암전 속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우아하게 흘렀다. 그 순간은 객석을 메운 주부들을 셜리가 지키고 있는 영국의 한 가정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조명이 들어왔다. 잘 정돈된 부엌. 액자가 반듯반듯 걸려 있고 냉장고에는 요리법을 적은 메모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다. 그 부엌 가운데 가구의 하나처럼 셜리 발렌타인으로 분한 김혜자가 앉아 있었다. “아, 김혜자네!” 조그만 탄성이 객석을 울렸다.

20년 결혼생활 끝에 타인처럼 멀어진 남편과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속에서 아내와 엄마로만 살고 있는 여인 셜리. 그녀는 우연히 떠난 그리스 여행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집을 떠난다. 잊혀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 셜리 발렌타인으로 살기 위해서.

‘전원일기’의 어머니 잔상이 너무 강해서였을까. 무대에 선 김혜자는 상상보다 훨씬 작았다.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고 결정적으로 연극배우치고는 딕션이 너무 어설펐다.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빠르게 진행되는 대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대사와 대사 사이를 거의 쉬지 않아 마치 말의 폭포수처럼 대사가 쏟아졌다. 시선처리도 많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아주 미세한, 불안에 찬 떨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100회나 했는데도 그녀에게는 배역을 지배하는 당당함이나 능수능란함이 보이지 않았다.



배우에게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다. 배우 스스로의 개성이 너무 강해 어떤 역을 하더라도 배우밖에 보이지 않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해석한 방향대로 배역을 능란하게 끌고 가는 배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보통 뛰어난 배우라는 칭송을 듣는다.

“배우는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거야”
그러나 김혜자의 모습은 그것과 달랐다. 완전히 왜소해진 이 여자는 셜리라는 역할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비행기표를 만지작거리며 여행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갈등하는 모습에서 더욱 그랬다. 남편의 흉내를 내며 소리 지르거나 허세를 떨 때조차 그녀의 어깨는 연약하게 흔들렸다.

객석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남편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며 한편으로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여자. 정돈된 부엌에서 한 점 얼룩 없이 깨끗한 앞치마를 두른 채 가족이 돌아오면 바로 식사를 차릴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바로 객석을 메운 주부들의 일상 그대로가 아닌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막이 바뀌면서 셜리는 차츰 자신을 찾아간다. 그리스로 떠나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잊었던 여자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셜리. 조그맣게 옹송그리고 있던 김혜자는 점차 피어나고 아름다워졌다. 셜리는 말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여자는 사랑을 받으면 피어나는 거야.” 정말 그랬다. 텅 빈 껍질같이 까칠하던 1막의 모습에서 놀랍도록 변화해가는 김혜자의 모습에 이미 관객들은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시선은 형형하게 빛났고 몸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기운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혜자는 철두철미하게 셜리였다. 한번쯤 자신의 목소리가 터져나올 법도 한데, 김혜자는 셜리라는 인물 속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기자는 무대를 바라보며 종종 김혜자를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토록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배우란 무엇인가. 맡은 역할을 자신 이상으로 표현해내는, 그리하며 마침내 자신을 지워버리는 배우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런 배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관객을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극의 마지막, 셜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와 가방을 버린 채 그리스의 해변에 남는다. 조금 의외의 결말이었다. 평생 집 안에 갇혀 살던 여자의 일탈치고는 너무 대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그녀는 꿈꾸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다시금 깨질지라도.

셜리는 와인 잔을 든 채 오지 않는 남편을 향해 말한다. “안녕하세요? 난 한때 당신의 아내였어요. 또 애들의 어머니였구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셜리 발렌타인이 됐답니다. 함께 와인 한잔 하시겠어요?”

이 마지막 대사를 읊을 때 김혜자는 극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여자로 변해 있었다. 아, 배우란 과연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부엌데기 같던 중년 여인네가 이토록 요요한 매력을 발하다니. 관객은 무대 위의 셜리 발렌타인, 아니 여자로 돌아간 자기 자신을 향해 끝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쩌면 평범한 이 1인극을 100회나 끌어온, 진실로 위대한 배우 김혜자의 모습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주간동아 2001.11.15 309호 (p82~83)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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