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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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잊으리, 10월17일 학살을…”

佛 경찰 ‘알제리전쟁’중 61년 시위대에 발포 … 학살 추모 동판 설치 좌우파 대립

  • < 민유기 / 파리 통신원 > YKMIN@aol.com

    입력2004-11-19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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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잊으리, 10월17일 학살을…”
    지난 10월6일 파리 교외 생드니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와 알제리의 친선 축구경기. 프랑스가 4대 1로 앞서고 있던 후반 30분경 알제리계 이민자 중심의 일부 응원단이 국기를 들고 경기장에 난입했다. 이 소동으로 이날 경기는 중단됐고 결국 취소 사태에 이르렀다.

    알제리가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1962년 이후 최초로 열린 축구경기가 알제리계 이민들의 난동으로 취소된 것은 이들에게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앙금 때문이다. 1954년에서 62년까지 전개된 알제리전쟁은 20세기 프랑스 역사의 가장 어두운 기간으로 평가된다. 알제리전쟁 당시 저질러진 프랑스군의 만행이 지난해 말 프랑스 언론에 의해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바 있고, 현재 정부에서도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다(주간동아 265호 2000년 12월28일자 참조).

    그런데 올 가을 알제리전쟁은 또다시 프랑스 정계의 좌우 갈등을 재연시키고 있다. 발단은 파리시가 10월17일 센강의 생미셸 다리에 40년 전 학살을 추모하는 동판을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10월17일 학살이란, 알제리 독립전쟁 기간중인 61년 10월17일 저녁 파리에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프랑스연맹이 조직한 평화적 시위에 대한 경찰 발포로 시위대 일부가 사망하자 시체를 센강에 던져버린 야만적인 사건이다. 10월17일의 발포에 이어 시위대에 대한 폭력과 체포 행진이 사흘간이나 계속돼 무려 1200명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어찌 잊으리, 10월17일 학살을…”
    이 학살은 당시 드골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언론보도에 대한 일부 통제로 자세히 알려지지 못했고, 이듬해 전쟁이 끝나고 알제리가 독립한 뒤에는 그나마 세인의 관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다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 시절인 8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들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 시작했고 90년대 들어와서야 당시 기록 자료가 TV에 방영되었다. 이때부터 매년 가을 알제리계 학생들은 대학가 주변에서 학살사진전을 열었고 각종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추모 시위를 전개했다.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럽고 추악한, 숨기고 싶은 이 사건이 정치권에서 공론화한 것은 40년이 지난 올 가을 사회당 소속 들라노에 시장과 다수의 시의원들이 추모 동판 설치안을 의회에 상정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지난 9월 시의회에서 동판 설치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좌우파의 역사인식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소수파인 우파는 학살 관련 동판 제작이 ‘선동’ 행위라며 반대했고, 동판 설치에 찬성한 좌파에 동조한 일부 우파 의원들도 “다수의 알제리인들이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살해됐다”는 동판 문구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 우파 의원은 이 문구 대신 “알제리전쟁은 역사에서 특별히 고통스러운 순간이며 이 장소는 가장 논쟁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에 이용됐다. 61년 10월17일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많은 알제리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문안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판 설치 장소 역시 좌우파간에 논란을 빚기는 마찬가지였다. 생미셸 다리는 당시 시체가 던져진 곳으로 파리 4구와 5구의 경계를 이룬다. 그러나 우파인 티베르 전 시장이 구청장으로 있던 5구청의 반대로 사회당 소속 구청장이 행정 책임을 맡고 있는 4구 구역에 설치되었다. 이 장소는 파리시경 건너편으로, ‘르몽드’ 보도에 따르면 파리경찰 노조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동판 설치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이날의 동판 설치행사에 정부 인사는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알제리전쟁이나 10월17일 학살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부터 매년 개최돼 온 추모 시위는 올해도 공산당과 각종 노동운동·시민운동 단체들의 주도로 열렸고, 시위 참가자 1000여명은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정부의 공식 인정을 요구했다. 반면 같은날 다른 장소에서는 100여명의 극우파가 동판 설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10월17일 학살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사망자 수와 발포 책임자 문제다. 80년 광주항쟁을 둘러싼 논란과도 비슷하다. ‘61년 10월17일 저녁 3명 사망’이란 경찰 발표를 기초로 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98년 이전까지만 해도 7명 사망과 40명 부상이었다. 그러나 98년 내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사망자 수를 32명으로 파악했고, 99년 총리실 조사는 10월17일과 18일 센강에 버려진 시체를 48명으로, 61년 한해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운동과 관련해 사망한 인원을 246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반면 61년 당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프랑스연맹이 발표한 희생자 수는 61년 한 해 200명 사망, 400명 실종, 2300명 부상 등이었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 책임은 일단 당시 파리시경 책임자였던 모리스 파퐁에게 모아진다. 파퐁은 2차 대전에서 나치 부역 혐의가 드러나 98년, 80세 나이에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지난해부터 노환으로 병원에 연금중이다. 문제는 파퐁에게 발포권을 허가한 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극좌파나 공산당, 그리고 일부 사회당 의원들은 당시 드골 대통령이 파퐁에게 발포 권한을 주었다고 의심한다. 4대 노총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의 힘’을 이끌고 있는 트로츠키파 라귀에르는 내년 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알제리 전쟁이 현재 진행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제국주의적인 식민정책의 산물이며 당시 좌우파 모든 정치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국무위원 중 한 명인 사회당의 뒤푸르는 61년 10월17일 학살이 당시 최고 권력자에 의한 범죄였다고 언급했다.

    한편 파리시의 추모 동판 설치는 당일 국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공산당 소속 브라르드가 “누가 파퐁에게 발포권을 주었는가”고 발언을 시작하자 우파 의원들은 “스탈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하나둘씩 의사당을 빠져나갔다. 시라크 대통령의 소속 정당으로 드골주의를 추종하는 ‘공화국 연합’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드골리즘과 일정한 거리를 보이는 또 다른 우파 정당 ‘프랑스민주동맹’은 자리를 지켰다. 10월13일 일간지 ‘뤼마니테’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조사 대상자의 50%만 61년 10월17일 알제리 시위대에 대한 폭력 진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며, 조사 대상자의 20%만 이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학살에 대한 국민 다수의 무지나 망각에도 여론조사에 응답한 45%가 10월17일 사건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비난받을 행동”이라고 답변했다. 반대의견은 33%였다.

    파리시내 거리나 광장, 주택의 담벽 곳곳에는 수백개의 동판이 붙어 있다. 모두 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또 제2차 세계대전중 레지스탕스 활동이나 폭격으로 사망한 평범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거나, 유명한 예술가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죽은 곳을 기념하는 것들이다. 이 많은 기억의 동판 목록에 프랑스가 기억해야 할 가장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으로서 10월17일 추모 동판이 추가된 것뿐이다. 그러나 이 동판 설치는 알제리전쟁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진행중인 정치적·사회적 노력에 일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노력이 언제 어떻게 결말을 맺든 동판 자체는 후세의 프랑스인들에게 대대로 1961년 10월17일 파리에서 있었던 야만적인 학살을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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