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9

2001.11.15

아프간 잡으려다 파키스탄 잡을라

이슬람 교도 연일 시위, 참전 쇄도 … 미국의 최악 시나리오는 핵 보유국 ‘파키스탄의 정변’

  •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입력2004-11-19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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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 잡으려다 파키스탄 잡을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두 개의 전선을 지휘한다고 한다. 아프간 전선과 탄저균 전선이다. 그러나 부시는 막아야 할 두 개의 전선이 안팎으로 더 있다. 안으로는 아프간 공습에 대해 비판적인 국내 여론전선이고, 바깥으론 아랍 민중의 반미전선이다. 부시 행정부가 특히 두려워하는 것은 아랍 쪽 분위기다. 입만 열면 ‘반테러 국제 연대’를 부르짖어 온 부시다. 그러나 아랍계의 반미, 친(親) 빈 라덴 정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한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저질러지는 이스라엘의 국가테러리즘을 감싸고 돈 부시는 반테러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래저래 부시 행정부는 초조하다. 11월17일부터는 이슬람의 라마단 금식 기간이고 이제 곧 겨울철이다. 11월 들어 미 공군 B-52 폭격기가 날마다 융단폭격을 해대는 것도 국면을 뒤집어보겠다는 부시의 초조함에서 비롯된다. 이즈음 부시는 말수가 적어지고 잘하던 농담도 하지 않는다. 실업률 5.4%가 말하듯 미국 국내 경기는 20년 만에 바닥을 기는데, 아프간전 한 달이 되도록 내놓을 만한 전과는 없고, 민간인 오폭 등으로 국제여론, 특히 이슬람권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탓이다.

    부시 미 대통령이 믿는 것은 오로지 파키스탄의 군부 실력자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다. 무샤라프는 따지고 보면 9·11 테러사건의 최대 수혜자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그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이라크 후세인만큼이나 외톨이 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5000명 넘는 사람이 희생당하면서 거꾸로 무샤라프의 주가가 급등했다. 부시 행정부가 빈 라덴, 탈레반 정권과 일전을 겨루려면, 나아가 부시독트린에 바탕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압박하려면 파키스탄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무샤라프는 한마디로 지정학적 프리미엄을 톡톡히 즐기는 상황이다.

    아프간 잡으려다 파키스탄 잡을라
    부시의 절박한 약점을 잘 꿰고 있는 무샤라프는 처음엔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경제제재 해제, 국제통화기금(IMF) 재정지원 등 미국으로부터 이런저런 실리를 챙겼지만 “라마단 기간만큼은 공습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공습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1월10일 뉴욕에서 부시와의 만남을 앞두고 무샤라프는 ‘라마단 기간 공습 가능’ 쪽으로 발언을 뒤집었다. 그 배경에는 부시 쪽에서 파격적인 반대급부를 제시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9·11 테러사건 전이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무샤라프는 부시와의 거래에 만족한 까닭일까, “(파키스탄이) 미국의 아프간전을 지원하는 데 대한 국내적 반발이 예상보다 약하다”며 정권유지에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과연 그럴까. 지난 10월 말엔 파키스탄 내의 무자헤딘(전사) 지원자 1만여명이 자동소총과 로켓발사기 등으로 무장한 채 아프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접경지대에 몰려들었다.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에선 수백명의 무장대원이 칠라스 비행장을 점령했다. 비행장이 미국의 아프간 공습에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주장과 함께. 또 다른 친(親)탈레반 무장대원들은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카라코람 고속도로를 막고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대미 지원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치권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이슬람 정당인 ‘자미아트 이 이슬라미’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 과격 이슬람 단체는 10월 말 라호르에서 개최한 반미시위에 운집한 2만5000여명의 군중에게 열흘간의 식량을 가지고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가 무샤라프 대통령 정부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오사마 빈 라덴도 11월1일 파키스탄 민중을 자극하는 또 다른 메시지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성명에서 빈 라덴은 “파키스탄 정권이 십자군(미국)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고 비난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탈레반 쪽이 무자헤딘 지원자들이 아프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리는 대목이다. 전술적인 문제 때문이다.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식량을 비롯한 전시체제 수립에 나선 탈레반 정권이 현재로선 외국 지원자들을 수용하거나 관리할 처지가 못 된다. 계속되는 공습이 무엇보다 큰 변수다. 10·7 아프간 공습이 시작된 후 지하드(성전)를 자원한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이미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 등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과 미국에서 온 지원자 5명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탈레반 쪽 발표를 떠올리면, 적어도 수백명의 지원자가 이미 아프간 안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들로선 30년대 스페인 내전, 80년대 아프간 내전에 참전했던 국제적인 자유전사 선배들의 뒤를 따르는 모양새다.

    아프간 잡으려다 파키스탄 잡을라
    미 부시 행정부가 걱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파키스탄 정변이다. 군사 쿠데타 또는 민중봉기로 무샤라프 정권이 무너지고, 친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는 사태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다. 그런 파키스탄에 정변이 일어나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선다면, 부시의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런 부시의 걱정을 잠재우려는 듯 무샤라프는 11월1일 “파키스탄에서 일체의 반정부 집회를 열지 못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칙령 하나로 친(親) 빈 라덴, 반미 정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게 아니다. 무샤라프로서는 도박에 가까운 강공 카드를 내민 셈이다. 반미시위 진압 탓에 이미 1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시위대가 집회 금지 칙령을 어기고, 이에 대해 경찰이 발포로 맞서며 강경진압에 나서 다시 희생자들이 늘어난다면, 파키스탄은 무장세력들의 봉기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럴 경우 파키스탄 군부 내 친탈레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쿠데타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부시와 무샤라프가 걱정하는 시나리오가 바로 이것이다. 파키스탄뿐 아니다. 전 세계 무슬림의 지하드 참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아프간 공습 뒤 빈 라덴을 지지하는 반미시위는 11억 신도를 지닌 이슬람권에서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빈 라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 남녀 구별 없이 빈 라덴이란 이름을 갖는 것은 그런 열기를 반영한다. 1억의 이슬람 신자를 가진 인도네시아에서도 공습 반대 반미시위가 자주 벌어진다.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인 친미 이슬람 국가다. 그럼에도 많은 민중에게 반미정서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수하르토 장기독재를 지지한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낳은 부정적 유산이다.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잣대의 하나가 인권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對)중동정책은 한마디로 실리 챙기기지, 인권은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이다. 이 나라는 민주헌법이란 게 없고 의회도 없다. 왕이 모든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쥔 독재국가다. 쿠웨이트 왕정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깡패국가의 독재자’로 몰아붙였지만, 사우디·쿠웨이트 왕정을 독재라고 비판한 적은 없다. 그걸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다. 미국이 해외 수입원유의 50%를 의존하는 사우디·쿠웨이트의 풍부한 석유자원(사우디 지식인이나 민중의 시각에선 미국 석유회사들이 수탈이나 다름없는 헐값에 가져가는 자원)과 대미 투자자본 때문에 이들 왕정의 부패와 인권탄압을 못 본 체해왔다. 왕정은 아니지만 이집트도 마찬가지다.

    아랍권 지식인들은 이런 문제점들을 오래 전부터 지적해 왔다. 9·11 테러사건 전에는 별로 귀기울이지 않던 주요 언론들도 이제 슬슬 논조가 달라지고 있다. 이슬람의 반미정서는 미국의 친(親)이스라엘 정책 탓도 크지만, 아랍 독재자들과 우호관계를 맺어온 미국의 잘못된 외교정책 탓도 크다는 지적을 하는 칼럼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9·11 테러참사와 아프간전을 계기로 미국의 대아랍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는 뒤늦은반성적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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