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8

2001.11.08

“양키스 고 홈! 후회 없이 던지겠다”

월드시리즈 등판 첫 동양인 김병현 … 고교 때부터 꿈꿔온 무대 ‘배짱投’ 자신

  • < 이종민/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특파원 > minyi@sportstoday.co.kr

    입력2004-11-18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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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키스 고 홈! 후회 없이 던지겠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선수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뛰게 된 김병현은 올해 나이 만 스물둘. 스무 살이던 지난 99년 미국 프로야구계에 진출해 그해 곧장 메이저리거로 승격한 뒤 3년 만에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꿈인 월드시리즈에까지 이르렀다.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어지러울 만큼 빠른 질주다.

    그러나 정작 김병현은 “운이 좋았을 뿐, 내가 잘난 건 하나도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끝내기 전이라도 기회만 되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어보고 싶다”고 할 만큼 김병현은 욕심 없는 젊은이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홈구장 뱅크원 볼파크에서 월드시리즈를 앞둔 김병현을 만나봤다.

    -디비전시리즈와 리그챔피언십시리즈에서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던지던데, 큰 경기에 강한 비결이라도 있나. 광주일고 대선배인 선동렬이 일본시리즈에서 뛰었는데 혹 학교의 전통은 아닌지.

    “빛고을의 힘입니다(웃음). 글쎄요.주위에서 다들 저를 위해 빌어주신 덕이겠지요. 중학교 때 야구부 전체가 담력 쌓는다고 공동묘지에 갔다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요. 어릴 때부터 한 대 맞으면 열 대는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물론 진짜로 사람을 때린 적은 없었지만요.”



    -야구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가장 떨린 순간은 언제였나.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때입니다. 그땐 금메달을 못 따면 군대에 가야 했잖아요. 결승전에서 제가 안 던지고 (박)찬호형이 던졌는데 그때 굉장히 긴장했지요. 잘 던져야 하는데 찬호형이 처음에 홈런을 딱 맞으니까 ‘어 이게 아닌데, 메이저리거가 이게 아닌데’ 싶더라고요.”

    -모든 야구선수들이 선망하는 월드시리즈에 서게 됐는데, 목표는 당연히 우승인가.

    “솔직히 말해 특별한 목표는 없어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목표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야구든 뭐든 끝냈을 때 후회만 안 하고 싶어요. 과거를 돌아봤을 때 ‘아, 내가 왜 여기까지밖에 못 왔지’ ‘이것만 아니었으면 더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하는 후회만 안 하면 됐지 다른 건 없어요. 원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으니까. 설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못하더라도 상관없어요. 물론 제가 등판해서 나중에 후회할 정도로 잘못 던지면 안 되겠죠.”

    -월드시리즈 상대가 메이저리그 최강인 양키스라 더 부담될 텐데….

    “아뇨. 별다른 느낌은 없어요. 양키스는 그냥 뉴욕에 있는 팀이죠. 사람들이 거의 다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고 다니고, 유니폼이 예쁘다는 생각밖에는요. 제가 들은 바로는 최고의 타자와 최고의 투수가 붙으면 투수가 이긴다고 하거든요, 확률적으로. 그거 믿고 던지는 거죠. 제가 최고 투수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물론 양키스가 4년 연속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해 선수들이 다 명성이 높죠. 저는 어릴 때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 이름만 들어도 다 야구의 신(神)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양키스 선수들과) 같은 레벨이니까 신경 안 써요.”

    -정확히 언제부터 월드시리즈를 꿈꿨나.

    “옛날부터 잠자면 꿈을 꿨어요. 94년인가 고등학교 때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던진 뒤 현지 호텔에서 잤는데 제가 월드시리즈에서 던지는 꿈을 꿨죠(당시 함께 참가한 김선우도 펜웨이파크 마운드 흙을 퍼담아 가며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키웠다). 잘 던졌는지는 생각이 안 나네요(웃음). 솔직히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메이저리그 야구를 직접 보면서 ‘아, 이런 데서 한번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야구를 취미로 시작했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나 이걸로 돈 벌어야지’ 하고 야구 시작하는 사람 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체육선생님인지 야구부장님인지 야구할 사람 손들어보라고 해서 시작하게 됐죠. 처음엔 투수도 하고 유격수도 해봤는데, 중3 때부터 언더핸드로만 던지기 시작했어요.고등학교 때부터 주위에서 ‘넌 야구 잘해서 좋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전 아직도 제가 잘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야구가 힘들어서 그만둘 생각을 한 적은 없었나.

    “운동이 원래 힘들잖아요. 중학교 때 팀 단체로 야구를 안 하겠다고 반항한 적이 있어요. 감독님한테 가서 맞더라도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그래? 그럼 주장부터 나와’ 그러시더라고요. 주장이 나가서 열 대쯤 맞더니 무릎을 꿇고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죠(웃음). 설마 했는데 진짜 때리신 거죠. 그래서 그냥 다시 야구를 하게 됐어요.”

    -어릴 때 물수제비를 너무 잘 던져 주위에서 다들 놀랐다고 하던데…. 그래서 언더핸드 투수가 됐다는 말도 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하여튼 소문은 무섭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남들보다 조금 더 잘 던지긴 했어요. 물수제비는 짱돌 중에서도 납작한 걸 잘 골라야 해요. 던지면 남들보다 멀리 던졌죠.돌도 오버핸드로 던지는 것보다는 밑으로 던지는 게 훨씬 멀리 나가요.”

    -월드시리즈를 마치고 한국에 가면 반응이 대단할 것이다. 영웅 대접을 받을 텐데….

    “영웅이요? 전 그냥 야구를 남들보다 좀 잘할 뿐이지,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혹시 저를 보고 목표를 세워 야구하는 어린 선수들이 있다면 그 애들한테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죠. 그렇다고 영웅 대접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그저 한 사람으로서 일하는 건데 그게 좀 잘될 뿐인걸요.”

    -좀 이른 얘기지만 그동안 은퇴하고 나면 야구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다, 그냥 대학 다니며 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럽다는 말을 곧잘 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중·고교 때 남들은 수업 끝나면 집에 가고 자유스런 생활을 하는데 우리는 오전·오후·야간 세 번씩 훈련했죠. 남들은 복에 겨워 그런 소리 하냐고 그러는데, 야구만 하다간 나이 들어 후회할 것 같아요.”

    -미국생활을 마치면 연고 팀인 해태(현 기아)에서 뛰어보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는데….

    “꼭 타이거즈가 아니더라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어보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한번 뛰어보고 싶었으니까. 지금 여기도 힘든 건 없지만 그래도 여기보다는 더 푸근하겠죠. 잘하든 못하든 한번 해보고 싶어요. 미국생활을 끝내기 전에 갈 수도 있겠죠.”

    -지금까지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올 겨울 장기계약을 맺으면 돈방석에 앉을 텐데(애리조나 구단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월드시리즈가 끝나면 협상을 하자고 제의한 상태다)….

    “저 진짜 돈 번 거 없어요. 앞으로 얼마 벌겠다 그런 생각도 없고요. 돈을 얼마 갖고 있어야 부자다, 그런 기준은 없으니까.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살 만큼 있으면 돼요. 지금은 2주에 한 번씩 월급을 받는데, 정확히 얼마 받는지는 말못하고요, 버는 건 다 써요.가구도 사고 쇼핑도 하고. 옷은 별로 안 사요.”

    -언젠가 결혼을 할 텐데, 어떤 여자를 만나고 싶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빨리 해야죠. 여자를 고르고 고르고 또 골라 가야죠, 한 번 하는 건데. 괜히 여러 번 하면 안 되니까. 어떤 여자? 글쎄요.그것도 자꾸 변하니까.”(얼마 전 김병현은 지나가는 말로 탤런트 김민희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언론에 보도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포스트시즌 때문에 지난해보다 귀국이 한 달 늦어지게 됐는데 한국 가면 뭘 제일 하고 싶나.

    “중·고교 때 친구들 만나 맥주 한잔 하며 얘기나 하고 싶어요. 월드시리즈 얘기 말고 옛날 얘기요. 제가 친구들한테 잘못한 게 좀 많아서요.”

    최근 2년 동안 김병현을 취재해 온 기자는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두 번 놀랐다. 마운드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는 대담함에 놀랐고,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짓는 세이브를 따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태연함에 다시 놀랐다. 어쩌면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저 정도 배짱이면 월드시리즈에서도 잘 해내겠구나’ 하는 믿음과 기대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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