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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따뜻한 숨결 ‘백제의 미소’ 지킴이

백제 명장 명맥 잇는 공예가 배방남씨… 나무 깎고 돌 다듬고 ‘40년 외길’

  • < 박은경/ 자유기고가 > siren52@hanmail.net

따뜻한 숨결 ‘백제의 미소’ 지킴이

따뜻한 숨결 ‘백제의 미소’ 지킴이
2시간 남짓 차를 달린 끝에 충남 천안시 풍세면 보성리 국도변에 자리잡은 ‘민학전가’(民學傳家)의 소박한 팻말과 마주쳤다. 나지막한 돌담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자 십수 세기를 뛰어넘은 백제 석불이 순박하고 따스한 웃음으로 주인보다 먼저 객(客)을 맞는다.

500평 들판엔 꽃처럼 만발한 ‘난쟁이 장승’이 석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앙증맞은 표정을 짓는다. 상모 쓴 장승, 혀를 쏙 내민 장승, 놀란 표정의 장승이 한껏 익살맞은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들.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데 객을 알아본 주인이 저만치서 걸어 나온다.

“전국 아무 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크고 무시무시한 장승이 안 보이지예? 여기 있는 건 죄다 ‘눈높이 장승’ 아입니꺼.”

민학전가의 주인장이자 전통공예가인 배방남씨(60)가 필자의 궁금증을 눈치챈 듯 먼저 말을 꺼낸다. “언젠가 아버지 손 잡고 구경온 대여섯 살 꼬맹이가 목이 아파 장승을 못 쳐다보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기라예. 그때부터 애들 눈높이에 맞게 작달막한 장승을 깎았다 아입니꺼. 그 후로 아이들이 오면 장승 수염을 잡아당기고 머리도 쥐어박으면서 재미나게 구경합디더. 이게 바로 산 문화공부지예.”

5년여의 준비 끝에 재작년 문을 연 민학전가는 말 그대로 ‘백성이 배우고 전하는 집’이다. 배씨의 작업장과 더불어 그가 집념 끝에 재현한 백제 마애불이 어우러진 이곳은 수시로 들러 전통문화의 숨결을 느끼고 직접 공예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40여 년 동안 전통공예가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민학전가를 열고 백제문화 재현과 전수에 안간힘을 쏟게 된 계기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 제대 후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공예는 뒷전으로 하고 자잘한 조각품을 깎아 근근이 생활했지예. 일본 민예사를 드나들며 몇 점씩 팔아 생계를 꾸렸는데 이때 마쓰모토·구마모토·나가노가 등지를 돌며 백제문화가 산재해 있는 걸 목격했어예. 그런데 일본에는 있는 백제시대 목불이 한국에는 없는 기라예. 그때부터 백제문화를 재현해 후손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작정했십니더.”

그 후 고향인 대구를 등지고 백제문화 근거지를 좇아 충남 천안으로 삶의 터전까지 옮긴 배씨. 그러나 국내엔 자료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백제시대 문화재를 재현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여 년 간 카메라를 메고 일본을 드나들며 불상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사진도 찍고 했지예.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우째(어떻게) 선(線) 하나하나, 불상마다 다른 표정을 제대로 살릴 수 있겠십니꺼. 그러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어예. 교토 병원에서 네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는데,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아입니꺼.”

따뜻한 숨결 ‘백제의 미소’ 지킴이
사고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톱질은 엄두도 못 내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그에겐 뒤늦게 아내가 생겼다. “조각할 돌과 나무를 구하느라 전국 각지 안 다닌 데가 없고, 조각에 미쳐 평생 혼자 살기로 작정했지예. 교토에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돌아와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 소개로 지금의 아내가 김치도 해다 주고 병 수발도 했다 아입니꺼. 그 바람에 다 늙은 쉰네 살에 장가를 들게 되었지예.” 만만찮은 경비 때문에 더 이상 일본에 갈 수 없게 된 배씨는 대신 일본을 드나드는 사람을 수소문해 불상 사진을 부탁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땐 그림엽서를 사다 달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손에 넣은 백제 목불상 엽서 한 장을 모델 삼아 오는 10월에 있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할 작품을 다듬는 배씨의 손길이 요즘 한창 바쁘다.

“아까 들어오면서 봤지예? 마당에 석불들이 죄 누워 있는 거. 구경오는 사람마다 여기 석불은 와 몽땅 누워 있노 안캅니꺼. 사람 키를 두세 배 훌쩍 넘는 부처님을 모실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기라예. 또 주위에 종교가 다른 사람이 있어서 불상을 세우지도 못하게 안합니꺼. 그나마 빌려 쓰는 이 땅도 조만간 비워줘야 합니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땅 한 평 없는 게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예.”

이름없는 석공예가로 밥벌이를 한 할아버지, 금은 세공사로 근근이 살림을 꾸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3대째 공예가의 길로 들어선 배씨지만 재주와 함께 가난도 대물림했다. “대구 약전골목 하면 유명한 곳이지예. 옛날엔 그 일대가 조상 땅이었어예. 그런데 조부님이 독립운동자금 댄다고 땅뙈기 한 평 안 남기고 몽땅 팔아치웠다 아입니꺼. 그 뒤로 아부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이라곤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 달랑 한 장이지예.”

조각 재료를 살 돈은커녕 집안에 쌀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3년 전 어느 날, 배씨는 ‘백제문화 재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칵 죽어 버릴까’ 모진 마음을 먹기도 했다. “돈 없는 설움, 땅 없는 설움, 어디 그뿐입니꺼. 토종문화장승축제를 벌였을 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어예. 돌쟁이가 뭔 장승을 안다고 축제를 여느냐며 욕도 실컷 들어묵었지예. 그래도 우짭니꺼. 가진 재주라곤 나무 깎고 돌 다듬는 거밖에 없는데, 백제문화를 살리는 건 내 민족사 일인데 춥고 배고프다고 손 놓으면 누가 하겠십니꺼.”

그나마 두 차례의 전승공예대전 수상 경력으로 조금씩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배씨. “어디 민속관에서 장승이 필요하다면 두말없이 여럿 깎아서 갖다주고, 또 백제 석불이 필요한 박물관에는 석불을 조각해서 주고 합니더. 그라마(그러면) 돈 대신 쌀을 보내주고 돌도 사다주고 안합니꺼. 장승 두 개 만들어 주면 음료수 한 통 사다 주는 사람도 있고, 젓갈 갖다 주는 사람, 나무 실어다 주는 사람, 천차만별이라예. 그래도 3년 전에 비하면 굶지는 않으니 다행이지예.”

최근 배씨에겐 더욱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생겼다. 충무공 백의종군비를 세울 계획을 추진하던 그가 지방관청의 무관심으로 속수무책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선뜻 후원자가 나섰기 때문이다. “천안시 광덕면 보산원리 광덕사 입구가 예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잠시 쉬어가던 장소입니더. 아들 면이의 전사소식을 듣고 통곡하던 곳이기도 하지예. 그런데 여기다 비를 세울라카이(세우려니까) 시에서 허가를 안 내준다 아입니꺼. 이길영 아산시장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도와주겠다고 아산에 세우라캅디더. 역사의 현장, 바로 그 자리에 비를 세워야 하는데 안타깝고 아쉽습니더.”

중학교 때부터 ‘죽기보다 싫은’ 석공예를 매를 맞으며 배운 배씨. 그런 그가 끝끝내 가난한 석장공의 삶을 접지 않는 이유는 민족관을 세우기 위해서다. “신라 백제 고구려 다 같은 한민족 아입니꺼. 선조들의 오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민족관을 세워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보다 우리 민족이 우리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전통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더.”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가 맨처음 하는 일은 마당으로 나가 돌과 만나는 일이다. 미명 아래 우뚝 선 거대한 자연석을 지그시 바라보노라면 퍼뜩 불상 모습 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이때를 놓칠 새라 연필로 돌에 직접 재빠르게 밑그림을 그리는 배씨. “백제인의 얼굴 표정은 충청도 사람과 닮아 있어예. 온순하고 모나지 않고 투박스런 인정미가 풍기지예. 백제 불상을 보면 희로애락이 담긴 서민적 표정이 스며 있어 다른 시대 불상보다 친근한 느낌이라예. 장승도 성난 놈, 웃는 놈 제각각으로 사람과 닮아 있지예.”

백제 조각작품의 특징을 설명하는 배씨의 얼굴은 흡사 그의 말과 닮아 있다. 작품은 사람을 닮는다던가. 어쩌면 백제문화에 그토록 천착하는 그는 백제인을 닮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간동아 2001.09.13 301호 (p92~93)

< 박은경/ 자유기고가 >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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