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0

2001.09.06

문화盲 CEO, 컴맹보다 무섭다!

  • < 한경구 / 국민대 교수·인류학 >

    입력2004-12-16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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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盲 CEO, 컴맹보다 무섭다!
    정보화 시대에 대해서는 매스컴에서 어찌나 열심히 강조했는지 누구나 컴퓨터를 모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구조조정에 피를 말리는 기업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아이에서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컴퓨터를 배우려고 필사적이다.

    텔레비전을 보노라면 대통령과 대권후보자들도 컴퓨터를 잘 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보화 시대인 만큼 ‘컴맹’이라는 평가는 피하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현대는 또한 세계화·국제화의 시대다. 국제화 시대에는 컴맹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으니 바로 ‘문화盲’이라 하겠다.

    문화맹이란 우리의 행위·감정·습관이나 가치관은 물론,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마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난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거나 중요한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문화맹이란 이렇게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에 빠져 있다.

    문화맹은 또한 우리의 특정 제도나 관행들이 우리 문화의 다른 부분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는 사실을 종종 지나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성공을 거둔 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잘 실행되지 않는 이유를 아랫사람이나 동료의 어리석음, 또는 집단 이기주의의 탓으로 돌린다. 문화맹이란 모든 제도나 관습이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 즉 문화라는 맥락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아가 문화맹은 모든 인간집단의 문화가 나름대로 자연환경과 역사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척도로 다른 문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문화맹은 자기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기술수준이 낮은 사람, 또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관습을 가진 사람을 야만적이며 열등하다고 무시한다. 그러는 한편 자기보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선진적’이라 생각하는 제도를 가진 사람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그래서 자신의 문화를 비하하고 욕하기도 하며 민족개조론을 부르짖기도 한다.



    문화맹이 컴맹보다 무서운 이유는 위험성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피해가 더욱 광범위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컴맹은 승진 누락 등 대개 자신의 불이익으로 끝난다. 그러나 문화맹 기업가나 정치가는 자신의 기업이나 거래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불편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뿐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의 오해와 분노를 사서 국제 친선과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또한 컴맹은 최소한 자신이 컴퓨터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맹은 자신이 문화맹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게다가 왜 문화맹을 벗어나야 하는지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문화적 감수성을 기르고 다른 문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려는 노력,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절제나 이들과 능숙하게 상호작용하기 위한 능력의 배양은 기회가 있어도 하지 않는다. 해외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거나 해외근무한 지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문화맹인 사람이 무수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세계화·국제화에 대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 성공적 해외직접투자나 외국인 고용은 물론 관광업의 발전이나 국가 이미지 제고, 그리고 우리 실정에 맞는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맹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국제이해교육과 문화인류학, 지역학 전문가들의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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