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가 도서대출 10권 중 2~3권

매과이어는 L.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다. 캔자스주의 황량한 초원에 사는 어린 소녀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오즈의 먼치킨랜드에 떨어질 때 재수없게도 동쪽 나라 마녀가 도로시의 집에 깔려 죽는 게 이 소설의 시작이다. 이 마녀가 서쪽 나라 마녀 엘파바의 동생 네사로즈다. 곧 국내 완간(전 3권)을 앞둔 이 책에 대해 해외서평은 “팬터지 소설 형식을 빌려 선과 악, 신과 자유의지 등의 문제를 극명하게 명상하였다”(퍼블리셔스 위클리)고 극찬한다.

지난 7월 ‘교수신문’이 전국 6개 대학 상반기 도서대출 현황을 발표했을 때 대학생들의 한없이 가벼운 책 읽기가 도마에 올랐다. 고려대 대출 1위에서 10위까지를 보면 ‘상도’ ‘가즈나이트’ ‘검마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국화꽃 향기’ ‘흑기사’ ‘만행’ ‘텔미 유어 드림’ ‘로마인 이야기’ ‘노자와 21세기’였다. 언뜻 보아도 팬터지물이 3~4권이다(‘해리포터…’를 팬터지에 포함시킬 것인지는 아직 논란중이다). 전북대는 ‘묵향’ ‘삼국지’ ‘성검전설’ ‘드래곤 라자’ ‘다크문’ ‘퇴마록’ ‘사이케델리아’ ‘카르세아린’ ‘탐그루’ ‘데로그 앤 데블랑’으로 나관중의 ‘삼국지’만 빼면 모두 팬터지 소설이다. 나머지 대학들의 대출순위도 10권 중 적어도 2~3권은 팬터지물. 이 신문은 “지금 대학 도서관은 무협의 옷자락 대신 마법의 칼과 방패가 번뜩인다”고 촌평했다.
이처럼 1990년대 후반 비로소 팬터지라는 이름 아래 모인 팬터지 소설들이 짧은 기간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음에도 문학세계에서 홀대 받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황당한 상황 설정이나 엉성한 문장 등 작품성 부족, 둘째, 즐기는 문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실도피적 내용, 셋째, 순수문학이 넘보기 어려운 상업적 대성공이다.

팬터지 소설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다. 그는 99년 비평집 ‘낮은 목소리의 비평’에서 “팬터지 소설은 통신망을 토대로 성장하여, 일부 출판사의 상업주의적 전략으로 기반을 공공히 하고, 나아가 컴퓨터게임·애니메이션·팬시산업으로 이어질, 문학이라기보다 활자로 된 신종 문화산업이다”고 했다. 덧붙여 “팬터지 소설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팬터지 소설이 순수문학에게서 외면당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현실은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팬터지 팬들에게서 열광적 찬사를 받아온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해 영국 비평계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과 질적으로 뛰어난 문학작품은 다르다”는 말로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팬터지 소설이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편입할 수 있던 데는 역설적으로 순수문학의 침체가 크게 기여했다. 권택영 교수는 “우리 문단은 사실주의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내면세계에 집착하면서 자의식적 성향을 보이는 소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 독자는 때로 훨훨 날고 싶어한다. 이영도의 팬터지는 이들이 갈증하는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면서 팬터지 소설들이 좀더 다듬어진다면 “한국 문단이 스스로 가두고 안주하는 리얼리즘의 견고한 성채가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고 예견했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황금가지 편집장)는 “팬터지 소설을 읽는 독자를 탓할 게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소설을 내지 못하는 문단을 탓해야 한다. 팬터지 소설은 프로컨슈머리즘을 실천하는 장이다.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이며 소비자는 언제라도 생산자가 된다. 사이버 공간(PC통신)을 통해 새로운 동인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다. 팬터지 소설이 비난 받은 것은 작품의 질 때문이었다. 90년대 팬터지는 작품성이야 어떻든 내기만 하면 팔렸고 출판사도 아마추어 작가들을 부추겨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들을 내놓기에 바빴다. 그러나 곧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작품이 다양해지고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면서 저급한 작품들은 저절로 도태되었다”(장은수).
장르문학 전문 웹진 ‘이매진’은 국내 팬터지 특집에서 무협지와 팬터지가 만나는 시점을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로 보았다. 이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팬터지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고, 이상균의 ‘하얀 로냐프강’은 여성 독자마저 팬터지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팬터지 시장을 확고히 다진 것은 이경영의 ‘가즈나이트’였다. 이와 같은 진화를 거치면서 팬터지 소설은 더 이상 문학이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장르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서울대 김성곤 교수(영문학)는 “오래된 맛의 음미가 중요한 포도주의 시대(순수문학)가 가고, 산뜻한 거품을 중요시하는 ‘맥주의 시대’(팬터지 소설)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세기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팬터지 소설의 인기를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