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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한글날, 국경일로 지정하라

  • < 김영명 / 한림대 교수·정치학, 한글문화연대 대표 >

한글날, 국경일로 지정하라

한글날, 국경일로 지정하라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자는 국회 발의가 있은 지 1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여론 조사 응답자의 90%가 찬성하는 이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인의 인식 부족과 재계의 반대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는 일은 비단 공휴일이 하나 더 생기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국가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암시하는 데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는 일이다. 이 일은 한국이 경제성장 위주의 ‘상업국가’에서 더 깊고 넓은 토대를 지닌 ‘문화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글날은 1991년까지 법정 공휴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태우 정부가 구정 휴일을 확대하면서 다른 공휴일을 줄일 필요가 있자 가장 만만한 한글날을 빼버렸다. 이후 한글과 우리의 고유 문화는 침체일로를 거듭했다. 김영삼 정부는 94년 ‘세계화’를 국가 정책의 핵심으로 선포하고 전통 문화나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려를 국가정책에서 밀어냈다. 이런 현상은 98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더욱 심해져 이제 ‘민족’ ‘정체성’ ‘자주’와 같은 말들은 경멸의 대상에까지 이르렀다. 세계화 이데올로기가 한편으로는 효율성 위주의 경박한 시장 이데올로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패권 국가와 세계 자본에 대한 문화적·경제적 예속을 강화하고 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구호가 없지는 않으나, 이 구호는 어디까지나 문화 ‘상품’에 관심을 둘 뿐 ‘문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은 훼손되고 찢겨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뒤 양반 사대부들의 저항으로 오직 아녀자들만이 쓰는 ‘암클’로만 존재하다가 우리 글자 생활의 중심으로 등장한 지 겨우 5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뒤 한글은 한자와 한문의 지배를 벗어나 점점 그 힘을 쌓아 ‘한글 전용’을 거의 실현하는 듯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몰아친 영어와 영문자의 침투 속에서 우리 말과 글은 다시 한번 외국 말과 글의 침투에 대항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우리 주변을 한번만 둘러봐도 영어와 영문자의 침투가 얼마나 깊숙해졌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이제 영문자는 한자 이상으로 우리 표기체계에 침투해 있다. 국어 사용을 선도해야 할 관공서에서부터 영어 병용과 혼용에 앞장서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선진 강대국을 따르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정부 정책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정부는 심지어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국어 시험을 제외했거나 제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영어 성적에는 가산점을 부여하겠다고 한다. 민간 기업이라면 그래도 이해가 가지만, 정부가 이런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문화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1세기는 정말로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 문화 ‘상품’의 시장 유통이 아니라 정신 문화의 저변 확대와 고유 문화의 보편적 확산이 국가 위상을 판가름하는 시대를 말한다. 지금과 같이 고유 문화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강대국 문화를 무조건 추종하며 시장과 상품만 생각하는 사고로는 문화의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문화 국가로 세계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고유 문화를 키워야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말과 글이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기체계라는 사실은 세계의 유수한 언어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홀대하는 지금의 사고로 우리는 결코 문화민족이 될 수 없다. 한글날의 국경일 지정은 눈앞의 경제적 손익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올바른 국가 발전의 길을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정부가 이에 적극 앞장서기를 촉구한다.



주간동아 2001.08.09 296호 (p96~96)

< 김영명 / 한림대 교수·정치학, 한글문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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