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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일본, 막가는 고이즈미

역사교과서 수정요구·비난·압력에도 요지부동… 한술 더 떠 신사참배 공언까지

  • < 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 ksshim@donga.com

버티는 일본, 막가는 고이즈미

버티는 일본, 막가는 고이즈미
지난 7월12일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항의해 외교·문화·국방 분야에 대한 대응조치를 취하고, 13일 국회가 일본 비난 성명을 채택해도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공식적인 논평이나 반응은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이 국방부의 교류중단 조치에 대해 “안전보장면의 교류는 대단히 중요한데 유감이다”고 논평한 것이 전부다. 한국 정부의 조치를 무시하는 듯한 이런 태도는 예상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으로서도 쓸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쪽에서 보면 교과서 파동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일본 정부의 주도 아래, 아니면 적어도 교과서 출판사들이 자율적으로 교과서 내용을 한국 정부가 요구한 대로 고치는 길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럴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다. 5월 초 한국 정부가 35개 항목에 걸쳐 재수정을 요구하자 일본 문부과학성은 전문가를 동원해 두 달간에 걸쳐 소위 ‘정밀조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고대사 두 곳 외에는 고칠 것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런 결론을 내는 데 두 달이나 걸려야 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이다. 따라서 일본이 ‘정부의 공식입장’을 뒤집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일본 정부는 국내의 반발에 직면해야 한다.

일본 정국도 한국에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일본은 지금 온통 참의원 선거에 신경이 쏠려 있다. 이번 선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내각이 발족한 뒤 처음으로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를 업고 자민당이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보이지만 선거의 속성상 다른 기능은 올스톱 상태다. 표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선거가 끝나기 전에는 한국에 대한 양보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이유는 일본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82년 교과서 문제가 터졌을 때는 일본 정부가 “교과서 검정 때 이웃국가를 배려한다”는 ‘근린제국조항’까지 만들어 한국과 중국의 주장대로 교과서를 고쳤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 국민은 물론이려니와 언론의 보도태도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일본이 가해자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사과만 하고 있을 수 있느냐, 교과서 정도는 이제 우리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것이 아니냐, 일본도 이제 패전국가의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른바 ‘보통국가론’이 알게 모르게 힘을 얻어가고 있다. 역사문제에 관한 한 한국 정부와 국민의 정서는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상대방 일본은 엄청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소나기가 멎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태도다.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시간에 맡겨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양국간 관계는 당분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對 아시아 정책 부재가 근본 원인(?)

버티는 일본, 막가는 고이즈미
오히려 또 다른 악재가 기다리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오는 8월15일 패전기념일(종전일)에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과서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는데, 설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4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한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왜 가면 안 되느냐, 꼭 가겠다”고 말해 왔다. 이제 한국과 중국이 반발한다고 해 참배를 안 한다면 일본 국내에서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정도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참배할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단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뒤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 복원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노력하면 뭔가 될 것이라는 과신에 가까운 자신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참배 후에는 양국관계가 더욱 꼬일 가능성이 큰데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 취임 때부터 외교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실제로 그는 취임 후 이렇다 할 대(對) 아시아 정책을 밝히지 않았다. 어쩌면 정책을 갖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확실하게 미국 중시정책을 천명하고 있다. 이를 실제로 증명하기도 했다. 미국이 지구온난화 방지협약인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하겠다고 하자 의정서의 골격을 바꾸어서라도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지난 6월30일 미-일정상회담에서 그런 입장을 밝혔다. 이 때문에 미국의 언론조차 고이즈미 총리가 고립무원인 부시 대통령의 입장을 살려주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고이즈미 총리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국으로서는 더 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는 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80%를 넘고 있다. 내각제인 일본에서 그만큼 높은 지지를 받은 인물은 없었다. 자민당 내부에 저항세력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현 정국에서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세력은 없다. 따라서 그가 문제를 풀려면 풀 수도 있다.

다만 그도 “교과서 재수정은 할 수 없다”고 공언한다. 교과서를 재수정하지 않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현재 한국 정부가 교과서 재수정 외에 다른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고이즈미의 선택의 폭은 그만큼 좁다.

현재 상정할 수 있는 방법은 출판사들이 자율적으로 수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도 간단치 않다. 문부과학성이 일단 합격판정을 내렸고, ‘정밀 조사’를 통해 문제가 없다고 한 이상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기술내용을 고치려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자율수정을 한다고 해도 정부와의 교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교과서 사태는 몇 가지 고비를 맞게 된다. 하나는 8월15일까지 각 시정촌(市町村) 교육위원회와 사립학교들이 문부성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채택 결과다. 교과서 문제 발단의 씨앗을 뿌린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은 당초 채택률을 10%로 잡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이 목표에 크게 못 미친다면 한국으로서는 “일본 정부는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일본인의 양식은 살아 있다”며 조금은 분노를 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표 채택률을 크게 넘었을 경우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 빚어질 것이다. 이와 관련해 ‘모임’ 교과서 채택 반대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다. 또 다른 고비는 양국 정상이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할 기회가 있는지다. 양국 정상은 격년으로 상호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올해는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할 차례다. 현재 분위기로는 어렵지만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상의 만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에서 양국 정상이 단독회담을 가질지가 관심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1.07.26 294호 (p16~17)

< 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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