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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기획|버림받는 남자들

‘하숙생 남편’ 설 자리 없다

시대 바뀌어도 가부장적 권위주의 여전… 외톨이 신세 자초해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하숙생 남편’ 설 자리 없다

‘하숙생 남편’ 설 자리 없다
40~60대 주부 대상 프로그램인 KBS 1TV ‘아침마당’에서 ‘아버지의 자리’라는 주제로 멍석을 깔았다(5월25일). 즉각 50대 가장이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했다.

“건설업을 하다 경기가 좋지 않아 쉬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열심히 돈 벌어다 주었지요. 그런데 한 1년 집에서 쉬어보니까 정말 제 신세가 한탄스럽습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아내가 집에 있는 저에게 제법 신경을 쓰는 듯하더니 요즘은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볼일 있다고 그냥 나가버려요. 물론 용돈도 잘 주지 않습니다. 애들 역시 저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술 한 잔 마시고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그냥 피하고 야단치면 우습게 여깁니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기가 막혔습니다. 엄마에게는 화장품을 선물하는 눈친데 제게는 담배 한 보루 안 사주는 겁니다. 제가 담배 좋아하는 것 알면서도 말이에요. 돈이 얼마나 든다고…. 요즘은 외롭다 못해 죽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 내용을 듣던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양정자 원장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데 그 가장은 여전히 주변(가족) 탓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강대 정유성 교수(교육학)는 이런 남성들을 가리켜 “벌거벗은 임금님의 몰골로 서서 제 두 눈을 찌르는 형국”이라 했다.

더 이상 ‘하숙생 남편, 하숙생 아버지’가 설 자리는 없다. 그들은 가족에게서 따돌림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혼을 당한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00년 혼인·이혼 통계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1970년대 이후 혼인율은 최저치를 나타낸 반면, 이혼율은 10배로 늘어났다. 그것도 15년 이상 산 부부가 이혼하는 비중이 91년 13.4%에서 26.3%로 크게 높아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가족복지인구정책팀(팀장 김승권)이 지난해 1만1388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0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 실태조사’ 결과도 이혼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이혼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혼을 ‘가급적 또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비율이 52.8%로 가장 높았지만, ‘경우에 따라 할 수도 있다’ ‘이유가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 ‘이유가 있으면 하는 편이 좋다’가 45.7%나 되었다.

이런 결과를 놓고 일각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이혼하는 ‘참을성 없는 세태’를 개탄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의식 불균형에 원인이 있다. 서울대 이순형 교수(소비자아동학부)는 한 신문 칼럼에서 “이혼 신청자의 5분의 2가 배우자 부정을 이유로 꼽지만 남편들의 외도가 늘어서라기보다 아내가 남편의 외도를 인내하는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여성의 사고는 개인주의, 남녀평등주의, 상호주의로 변하는 반면, 남성의 의식은 제자리인 것이 부부 갈등과 가족 해체의 주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양정자 원장은 최근 한 중년 남성(A씨)과 상담과정에서 유치할 정도로 권위만 앞세우는 가장의 몰락을 확인했다. A씨 역시 일만 알던 사람이라 정년퇴직 후 가족과 잘 지내지 못했다. 늘 “돈을 못 버니까 가족들이 나를 무시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힌 그는 돈으로 권위를 되찾겠다는 생각에 자기명의의 집문서를 가지고 집을 나갔다. 매매계약을 했지만 진짜 집을 팔 생각은 없었고 계약금을 날리더라도 가족에게 일종의 위협용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A씨는 전화로 집이 팔렸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통보했다. 그러면 아내와 자식들이 당장 자기에게 와서 빌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A씨의 큰 착각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아 문득 불안해진 A씨가 집으로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딸이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몰래 집을 판 아버지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아내와 자식들은 이혼소송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집에 대해 소유권이전금지가처분신청까지 한 상태였다. A씨가 아내를 만나려고 하자 딸이 나서서 “소송 앞두고 엄마의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며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을 찾아온 A씨는 이혼당하고 싶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가장의 권위를 찾으려다 남은 인생을 망친 케이스죠. 무조건 아내를 만나서 비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부모의 이혼문제에 자녀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전에는 부부 당사자의 이야기만 들었는데 최근 인터넷 상담이 늘면서 자녀의 입장에서 들을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대부분 ‘어머니의 희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양정자). 이혼 청구자의 65% 이상이 여성이다. 노년층의 경우 여성의 이혼 청구율이 80%에 이른다고 한다. ‘이혼당하는 남자’가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하숙생 남편’ 설 자리 없다
양원장은 35년 동안 11만 건의 상담을 통해 수없이 많은 남성의 실패에 접하고 실패한 남성들의 이야기를 모아 ‘남자가 변해야 남자가 산다’를 출간했다. 양원장은 이 사례집을 내면서 “매스컴은 여전히 전통적 가족우위주의, 권위적 가부장제도를 기반으로 해 남편 기 살려주기, 고개 숙인 아버지 권위 살려주기, 남편`·아버지 자리 찾아주자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잘못된 정보를 준다”며 “남자들이 가족에게서 따돌림당하는 원인이 마치 아내와 자식에게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주라고 요구한다면 가족들에게서 따돌림당하는 남자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예로 명예퇴직과 실직에 대한 위기감으로 하루하루 불안한 시절(96~97년) 유행한 것이 ‘남편 기 살리기’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어느 광고는 가장의 퇴근을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아버지가 먼저 드셔야죠” 하면 “그래, 내가 이 맛에 산다”며 활짝 웃는 가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성들이 ‘살 맛’이라고 하는 그 맛은 달콤한 독약일 수 있다. 그 맛에 길들인 남성들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좀처럼 변화할 줄 모르는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다. 정유성 교수는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에서 남성들 내부에 뿌리 박힌 지배와 억압의 문화가 IMF 사태 때 위기타령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섣부른 남편 기 살리기 운동이 오히려 남편에게 더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할 수도 있다”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이제 남자 스스로 변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물론 뿌리깊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익숙한 남성들에게 갑자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양정자 원장이 ‘남자가 변해야 남자가 산다’는 책을 냈을 때 주위 남자들의 첫 반응은 “남자가 죽어야 한다고 썼다면서요?”였다. 변화를 죽음으로 알 만큼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성들. 실제 상담중에도 많은 아내들이 “제 남편은 죽어야 변할 거예요”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그러나 변화의 계기는 필요하다. 그것은 “남성 역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정유성 교수는 “남성다움이란 순식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심지어 ‘제조된다’는 표현을 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남성화의 대가로 사내대장부콤플렉스, 온달콤플렉스, 성콤플렉스, 장남콤플렉스, 만능콤플렉스 등 각종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지난해 3월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는 ‘남성들을 위한 가족생활향상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8명의 남성들(35~43세)에게 이 프로그램을 테스트를 했다. 1단계 남성 자신에 대한 이해 프로그램에서 남성다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남성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점, 혹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점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스스로 남성답다고 느낄 때: 자신의 주장을 자신 있게 펼칠 때, 가족이나 주위 사람이 겪고 있는 위기상황을 해결해 줄 때, 솔직하고 용감할 때, 불의를 보고 못 참을 때, 물리적으로 힘든 일을 할 때, 아들(남편·형)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을 때, 문무를 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남성답지 못하다고 느낄 때: 남에게 부탁해야 할 때, 사소한 것까지 간섭할 때(“성격상 지저분한 것을 못 봐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정리정돈을 잘 못해 답답하니까 내가 하긴 하는데 이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때”).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는 “남자니까 남자다운 거지…”라는 태도를 보이며 남성다움으로 인한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던 참석자들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점차 남성다움에 대한 이상(理想)이 때로는 남성들을 위축시킨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한국가족상담연구소의 송말희 책임연구원은 ‘남성 자신에 대한 이해’ ‘여성에 대한 이해’ ‘가족 안에서의 나’ ‘우리 부부 함께 가기’로 된 4단계(6주간) 프로그램으로 남성들이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프로그램 중 남편의 가족역할 수행 정도를 남편과 아내가 각각 질문지를 통해 비교하는 테스트가 있어요. 아내의 응답은 밀봉해서 가져오도록 하죠. 그것을 열고 공개하는 순간 너무 큰 시각 차 때문에 쇼크받는 남편들도 있어요. 특히 남편들은 자녀교육이나 재산관리, 친척관계 유지보다 부부관계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국가정경영연구소 내에는 ‘남성들을 위한 가족생활 향상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회장 김영석)이 결성되어 있다. 지난해 7월 이 모임이 만들어진 후 29명의 회원이 활동중이다. 처음에는 프로그램 이수 후 사후교육이 목표였지만 요즘은 남성들끼리의 ‘수다’에 비중을 둔다.

‘하숙생 남편’ 설 자리 없다
“회원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대부분이에요. 부부관계에서 별거나 이혼 등 심각한 위기를 겪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없지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이죠. 남자들끼리 모여 부부·부모·자녀 등 가족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아내의 바람기와 같은 털어놓기 힘든 고민까지도 나누고 함께 풀려고 애쓰죠(박근혁 총무).” 서울에서 해운업을 하는 박씨는 1년 가까이 서울·부산을 오가며 주말부부로 살다 보니 가족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이 모임을 찾았다.

“좀더 일찍 남편역할에 대해 배웠다면 신혼 초에 그렇게 많이 싸우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부관계를 풀어가는 법, 아내의 입장에서 시댁과 친정의 관계 살피기와 같은 것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시행착오도 많았죠. 모임에 참석한 후 부부 간에 대화가 많이 늘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결코 아내를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요즘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자주 이메일을 주고받아요.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접대문화인 것 같아요. 사업상 접대할 일이 많은데 단란주점 같은 데 가서 밤 늦게까지 술 먹고 노는 것은 우리 가정에도 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 가정도 해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말 골프를 안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거죠.” 그는 지난 목요일 모임에 나온 사람들에게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미용팩’ 설명서를 나눠주었다. 주말에 집에서 아내와 두 딸을 뉘어놓고 팩을 해줄 참이다. 스킨십을 통해 가족들에게 달라진 남편·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가정도 경영이다”라는 말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권해 온 강학중 소장은, 변화 자체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라고 조언한다.

“생각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몇 가지 처방으로 모든 것을 개선하려는 사람이 있죠. 날마다 새벽귀가를 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가정이 소중하다며 일찍 귀가하고 가족들과 외식하러 가거나 직접 요리하는 등 아주 달라진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심 내가 이렇게 변했으니 가족들도 그에 맞춰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죠. 그러나 이미 남편·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한 가족들은 오히려 불편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깁니다. 변화를 시도한 남편들이 크게 좌절하는 것이 바로 이때예요. 이 고비를 넘겨야 진정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나 아들교육·남자교육·사회인교육·직장교육은 받았어도 아버지교육·남편교육은 한번도 받지 못한 남자들에게도 진정한 ‘변화의 교육’이 필요한 때다.





주간동아 2001.06.21 289호 (p68~70)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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