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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유혈충돌… 모래성 ‘중동평화’

‘유대인 생존’ 최우선 국제사회 묵인... 약자 팔레스타인 ‘몸폭탄’으로 끝없는 저항

  • < 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휴전… 유혈충돌… 모래성 ‘중동평화’

휴전… 유혈충돌… 모래성 ‘중동평화’
우리는 지금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한 굴 속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다. 매파가 득세한 이스라엘의 정치 현실과 분노·좌절감에 가득찬 팔레스타인 정치정서를 감안한다면, 굴의 끝이 안 보이는 유혈투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루살렘 현지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온건파 지식인의 암울한 중동 현실진단이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거지역인 동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언론센터’라는 일종의 여론조사기관을 운영하는 가산 카티브 교수(베르 자이트대·언론학)는 중동평화에 비관적이다. “이스라엘 정치인과 과격파의 성향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그들은 평화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군상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며 매파인 샤론(이스라엘 총리)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휴전은 팔레스타인 재충전 기회?

카티브 교수와는 달리 많은 이스라엘인 지식인은 12억 아랍인들에게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선 강공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제한된 자치를 마련해 준 1993년 오슬로 평화회담도 이제는 원인무효이고,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선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는 논리가 주류를 이룬다. 67년 6일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불법점령하였다는 국제법적인 시비는 속 모르는 제3자의 한가한 논리쯤으로 여긴다.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이지, 낭만주의는 아니라는 태도다.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은 유혈충돌을 즉각 멈추라는 중재안(미첼 보고서)을 낸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인 압력에 따라 잇달아 휴전을 선언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열흘 만에 거둬들였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과연 휴전이라는 게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현지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제랄드 스타인버그 교수(바르 일란대·정치학)는 얼마 전 필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 대결국면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인은 끔찍한 죽음과 부상에도 국가와 경제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시적인 휴전은 팔레스타인 쪽으로 하여금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시간을 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에 이롭지 못하다고 본다.” 이런 주장에 대해 현지에서 접촉한 한 팔레스타인 정치인은 이런 반론을 편다. “아리엘 샤론의 전략은 단순해 보인다. 군사적으로 탱크와 전폭기로 팔레스타인을 꽁꽁 묶고 경제적으로 질식시켜 아라파트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한편으로 불법 점령지에서의 무력 과잉사용이란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의식해 시한부 정전 제안으로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억지 포장하려 든다. 그러나 체질상 이는 어려운 일이다. 샤론은 곧 자신이 숨긴 피 묻은 칼을 다시 꺼낼 것이다.”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인 하난 아쉬라위(여)의 주장이다. 그녀는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의 측근으로 미국과 서유럽을 향해 아라파트의 대변인 노릇을 해온 여성 정치인이다.



중동 현지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이스라엘 지도층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독립국가 건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어 골드(전 유엔 대사, 현 샤론 총리 보좌역) 같은 이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현재로선 전혀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생존이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적 공존은 아닌 듯 보였다. 도어 골드를 포함한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반대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는 안보 위협이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서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장력을 갖출 뿐만 아니라, 쿠바가 미국에 위협적이었던 것처럼 이라크의 미사일을 들여와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휴전… 유혈충돌… 모래성 ‘중동평화’
이스라엘에는 모두 샤론 같은 매파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중지하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파괴를 중지하라” “샤론은 강공책으로 더 이상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이 물러나야 평화가 온다” 예루살렘 시내 한복판의 하이야트 호텔 건너편에서 이런 주장을 담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이었다. 헤브루대 재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50여 명의 작은 데모대는 자신들을 ‘이 땅의 평화주의자들’로 여긴다. 이스라엘에선 이들을 흔히 좌파로 부른다. 수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정치이념상 중도좌파라 할 노동당, 또는 좌파인 메레츠당 지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대학생들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건 평화주의자들은 샤론 정권에 조직적인 비판을 퍼붓는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과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아래 벤야민 네타냐후, 아리엘 샤론으로 이어지는 리쿠드당의 대 팔레스타인 강공책을 비판해 왔다. 이들 가운데는 ‘지금 평화’(Peace Now) 같은 중도적 성향의 단체도 있고, 구시 샬롬(Gush Shalom), 배트 샬롬(Bat Shalom) 같은 급진적 단체도 있다. 이들은 샤론이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할 움직임을 펴온 데 대해 강력히 비판해 왔고, 67년 이전의 경계선으로 이스라엘이 물러나야 중동에 평화가 온다는 현실인식을 지니고 있다.

이런 평화주의 단체들은 이스라엘 가정에 전화를 걸어 “예비역들이 소집되면 팔레스타인 쪽에 과잉사격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펴고 있다. 이들의 주장으론 예비역들 가운데 양심적 소집 거부자 60명쯤이 최근 몇 달 새 생겨났다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남녀 모두 3년 군복무를 해야 하고, 제대 뒤엔 1년에 1개월씩 예비군 소집에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100만 명의 아랍계 사람이다.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의 경계선상에서 동예루살렘에 속한 다마스쿠스 문 앞 광장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시민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털어놓은 고민은 “이스라엘인도, 팔레스타인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에서 오는 불이익”이었다. 이들은 유대인처럼 병역의무는 없다. “이스라엘 정부도 우리 손에 총을 쥐어주고 싶지 않은 게 그 이유일 것”이라고 한 젊은이는 말한다. 병역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취업이 어렵다. 이른바 이스라엘 주류사회에서 아랍계 시민이 성공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와 같다는 얘기다.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은 67년 6일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영토에 남아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회교도가 다수(일부는 기독교)인 이들의 정치 정서는 친(親)이스라엘이라기보다는 친팔레스타인이다. 이들이 이스라엘군의 무단통치와 동족학살에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9월 말 팔레스타인 사람이 인티파다(봉기)를 시작한 이래 지금껏 16명의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이 이스라엘군에 시위로 맞서다 피살되었다. 이들은 인티파다가 진행됨에 따라 극우적인 성향의 이스라엘 시민에게서 공격을 받기도 했다. 최근 텔아비브 폭탄 테러로 18명의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피살되자, 일부 아랍계 상점들이 불에 타고 회교사원 쪽에 돌멩이가 날아든 것도 한 예다.

지중해를 따라 길게 뻗은 가자(Gaza) 지역의 해변들이 지금의 유혈사태로 텅 빈 반면, 이스라엘 쪽 해변은 사정이 다르다. 텔아비브 해변엔 ‘예루살렘 해수욕장’이란 이름의 휴양지가 있다. 열흘 동안의 빡빡한 취재일정 탓에 필자는 그곳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묵던 예루살렘의 한 호텔 종업원은 “지금 그곳엔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태우는 젊은이들로 그득하다”고 귀띔했다. 그들에겐 이스라엘군의 도로봉쇄로 팔레스타인인들이 받는 경제적 고통은 먼 나라 소식쯤으로 여겼을 법하다. 반이스라엘 무장조직 하마스 요원의 폭탄 테러로 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흥업소도 바로 이 해수욕장 부근에 있다. 그러나 일부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끝 모르는 정치·사회적 혼란과 피 흘리는 분쟁에 실망한 나머지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휴전… 유혈충돌… 모래성 ‘중동평화’
12억 인구의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을 말로만 비난할 뿐 이렇다 할 도움을 팔레스타인에 주지 못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현재의 유혈충돌 사태를 팔짱만 끼고 바라보는 모습이다. 5월 말 도하(Doha)에서 아랍 외무장관들이 모였을 때도 회의는 이스라엘과의 외교단절이란 상징적 결의를 내리곤 하루 만에 싱겁게 막을 내렸다.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 문제를 두고 분열상태다.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jihad)을 주장해 온 이라크가 가장 강경한 편이고, 이란과 시리아만 범아랍권의 이스라엘 보이콧을 주창하면서 이라크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수준이다. 이라크·시리아 등 대이스라엘 강경국들은 미첼 보고서가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기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고, 아랍권의 요구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회의기구(OIC)를 구성하는 아랍권은 이집트·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 등 온건파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특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대외정책의 가닥을 잡아왔다. 이스라엘에 강경대응을 못하는 배경이다. 군사적 수단에 바탕한 대이스라엘 강경투쟁보다는 평화협상을 통한 사태해결이 온건파들이 내건 중동위기 해법이다. 민주적인 정권과는 거리가 먼 이들 아랍권 국가들은 대이스라엘 정책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데 더 관심이 높다는 불만이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일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스라엘이 점령중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제평화유지군 파병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의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많은 평화유지군이 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같은 작은 나라에도 1만3000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지금 시에라리온은 조금씩 평화가 찾아들고 있다. 반군을 당하지 못하는 허약한 제3세계 군대로 이루어진 평화유지군일망정, 말 그대로 ‘평화유지’의 본분은 다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권 침해를 이유로 두손을 내저으며 반대하지만, 중동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이집트 접경지대인 시나이 반도(이집트령)가 그러하다. 길게 보면 지난 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이래, 짧게 보아도 67년 6일전쟁 이래 긴장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유지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주간동아 2001.06.21 289호 (p58~61)

< 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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