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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문 권노갑 “내 갈 길 간다”

분노 삭이며 더 ‘큰일’모색… “당권만이라도 사수하겠다”

  •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다문 권노갑 “내 갈 길 간다”

입다문 권노갑 “내 갈 길 간다”
내가 소장파에게 비난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 인사에 개입한다, 당무에 관여한다고 말하는데 추상적으로 얘기할 게 아니라 잘못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이런이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해야 할 것 아닌가. 정말 잘못되었다면 내가 고치고….”

민주당의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측근 박양수 의원에게 토로한 최근 심경이다. 감정을 절제했지만 행간 곳곳에 분노가 엿보인다. 지난 총선 때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영입, 자식처럼 동생처럼 아끼던 그들이 비수를 들고 대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가운데 몇몇 인사는 공천 당시 소위 ‘충성 맹세’까지 했던 인물들이라 한다. 권 전 위원의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박양수 의원의 설명. “수도권 출신 한 의원의 경우 지난 총선 공천을 받을 때 ‘당에 들어가면 민주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던진 권 전 위원의 발자취를 조심스레 배우고 따라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앞장서 성토하더라.”

배신감은 허탈감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분노로 바뀌었다. 권 전 위원의 측근들은 “이 꼴 당하려고 (지난 총선 때) 젊은 피 영입에 앞장섰느냐”는 탄식을 쏟아낸다. 동교동의 분노는 지난 6일 최고조에 달했다. 대통령이 국정쇄신 구상을 밝히겠다고 한 상황에 5일 초·재선 의원들이 추가 모임을 열고 ‘인적 쇄신’ 을 요구한 것이 이들을 자극한 것. 권 전 위원의 분노가 특히 심했다고 한다. 권 전 위원의 당시 심경.

입다문 권노갑 “내 갈 길 간다”
“나에게는 몇 번을 공격해도 좋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대통령이 입장을 밝힌다고 했으면 기다려야지, 어떻게 또다시 공격할 수 있나. 뭔가 음모가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나.”

이런 분노의 기류가 동교동 내에 정면대결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권 전 위원이 이를 가로막았다. 그가 보기에 정면 대결은 확전이며 이는 곧 공멸(共滅)로 가는 길인 것. 개인적 차원에서도 부인 박현숙씨의 눈물어린 호소가 권 전 위원을 고민스럽게 만든다고 한다. 특히 요즘 같이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면 박씨의 눈물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 조재환 의원에 따르면 최근 정풍 파동으로 권 전 위원이 고민하자 박씨는 “여보, 뭘 그리 복잡한 길을 가려 합니까. 모든 걸 던지고 편안하게 삽시다”라며 읍소했다고 한다. 자신의 최대 정치적 후원자인 ‘안 사람’의 호소는 또 다른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권 전 위원은 자신을 압박해 오는 이런 환경에 일체 침묵으로 응했다. 측근들에게도 함구를 주문했다. 정풍과 관계없이 갈 길만 가자는 메시지다. 이와 관련해 조의원은 ‘성공한 대통령과 정권 재창출’이라는 두 가지를 동교동의 목표로 정리한다.

동교동 인사들은 집권 말기가 다가올수록 권 전 위원과 동교동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교동이 아니면 수행하기 힘든 고난도의 역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부정적인 여론이 있음에도 김대통령이 권 전 위원의 조기 정계복귀를 결정한 것은 집권 후반기 정국운영에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상황에 그의 손발을 묶어버리면 당은 물론 청와대도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기도 하다. 권 전 위원의 2선 후퇴는 곧 동교동의 무장해제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대권 주자들의 조기 난립과 김대통령 레임덕의 가속화를 몰고 온다는 것이 동교동의 시각이다.

그렇지만 권 전 위원의 역할이 커질수록 오히려 정권 재창출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는 반대의 지적도 설득력을 얻는다. 폐쇄적인 동교동 식 정치문화에 대한 국민의 거부 정서가 그들의 활동이 커질수록 더 증폭될 것이란 설명이다. 정풍운동의 핵심도 동교동에 대한 이런 부정적 정서를 미리 읽고 제거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적 대안이 없는 한 동교동이 안고 있는 이 업보는 동교동의 또 다른 고민거리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동교동 인사들은 이런 흐름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13일로 예정했던 김대통령의 기자 회견이 연기된 것에서도 일부 읽을 수 있다. 가뭄이 회견 연기의 주요 명분이었지만 애초부터 국민과 소장파들을 두루 만족시킬 만한 카드를 마련하기 힘들었고 이것이 회견 연기의 숨은 배경으로 거론되는 것. 회견 연기 발표 후 동교동 주변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재신임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동교동 인사들은 더 이상 파문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비록 상처 입은 몸이지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동교동의 요즘 움직임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외풍과 관계없이 가던 길을 가자는 흐름으로 비춰진다. 눈에 띄는 것이 권 전 위원의 이사. 이훈평 의원에 따르면 이사는 7월 초로 예정되어 있다. 다소 한가하게 보이지만 권 전 위원에게 이사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권 전 위원이 현재 살고 있는 종로구 평창동은 정치인에게 ‘터가 안 좋은 동네’로 유명하다. 최형우 서석재 전 의원을 비롯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이 동네에서 ‘큰일’을 당했다. 권 전 위원도 시련과 좌절의 연속이다. 측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평창동을 벗어나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권 전 위원은 용산구 동부이촌동에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를 가려다 정풍 파동에 휘말렸다.

입다문 권노갑 “내 갈 길 간다”
권 전 위원의 한 측근은 “지난 겨울 눈이 많이 와 통행에 불편이 많았다”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지만 기가 센 ‘터’를 벗어나 이어지는 불운과 결별하겠다는 계산이 더 커보인다. 한 측근은“이사를 한다면 권 전 위원으로서는 비상한 결심을 한 것으로, 정치적 역할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비선 조직의 본부로 지적되는 마포 사무실도 그대로 운영할 계획이다. 조재환 의원은 “김대통령이 폐쇄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권 전 위원이 정풍 파동 와중에도 마포 사무실을 거의 날마다 찾은 것은 사무실을 사수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6월17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계획된 동남아 외유를 급히 취소한 것도 밀려 나가는 것처럼 비쳐진 모양새가 싫었기 때문이다. 오는 6월 말 하와이 동서문화연구센터에서 열리는 세미나도 같은 이유로 불참키로 결정했다.

이같은 일련의 기류에서는 최악의 경우 당권만이라도 사수하겠다는 안간힘도 느껴진다. 소장파의 정풍 운동과 동교동 구파의 힘 겨루기에는 기본적으로 당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자리잡고 있다. 동교동 인사들 사이에서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더라도 당권만은 지켜야 한다’는 현실 인식은 절대절명의 것이다.

그렇다고 동교동이 막무가내로 자기 길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 현실과 여론의 추이에도 꽤나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여권 핵심부에 포진하고 있는 동교동 인사 몇 명의 희생은 각오하고 있다(동교동 한 인사)”는 말에서 동교동의 각오가 묻어 나온다. 정동영 최고위원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비롯, 소장파를 무력화하는 작업을 동교동 인사들이 주도하는 점도 동교동의 다양한 전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권 전 위원과 동교동 구파를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교동의 분열상, 동교동에 대한 국민의 싸늘한 눈길, 여권 내부에서 부는 ‘세대 교체’ 바람, 소장파의 계속되는 문제 제기 등 일련의 상황은 그들의 입지를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그래서 권 전 위원의 앞길은 평탄해 보이지 않는다.





주간동아 2001.06.21 289호 (p14~15)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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