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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국가가 시장에서 발뺄 때 아니다

  • <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

국가가 시장에서 발뺄 때 아니다

국가가 시장에서 발뺄 때 아니다
최근 두 갈래의 개헌 논의가 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헌법의 권력구조조항을 고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전경련에서는 헌법의 경제조항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주로 차기 대선 주자군(走者群)에 속하는 사람들이 헌법의 권력구조를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전경련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또 하나의 개헌론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지난 1월25일 전경련은 ‘우리 헌법의 경제조항이 지나치게 많으므로 대폭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헌법의 경제관련조항이 서구 선진국에서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4개를 넘지 않는데 우리 헌법에는 무려 15개나 있고 또 그 내용도 너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이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신문은 한 귀퉁이 정도를 할애해 그같은 내용을 보도했지만, 이에 주목한 독자는 거의 없었다.

전경련의 주장에 귀기울일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헌법의 경제조항을 보면 국가는 성장과 안정, 분배정의, 독과점 규제 등을 위한 개입뿐 아니라 국토개발과 농어촌개발을 위한 계획수립 및 대외무역 육성을 위한 규제와 조정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국가개입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으나 성숙단계로 들어선 현 시점에서는 분명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경련의 개헌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국가개입 철폐와 시장주도경제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부 학자들의 연구보고서 형식을 빌려 헌법의 경제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번 보고서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경계심을 늦출 수 없다.



국가의 경제개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본형성과 축적을 주도하는 신중상주의적 개입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복지 내지는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개입이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국가 개입은 주로 급속한 성장을 위한 신중상주의적 개입이었다. 그것은 서구 사회가 보여준 복지 내지는 재분배를 위한 개입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복지기반 미구축 상태서 시장주도 경제는 시기상조

복지나 재분배를 위한 사회적 기반이 채 구축되지 않은 한국에서 시장으로부터 국가의 전면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국가의 역할이 남아 있다. 시장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지닌 국가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다만 개입의 내용은 달라질 필요가 있다. 과거와 같은 장기개발계획은 이제 한국에서 어렵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구조조정을 완수하기 위해 국가는 필요하며, 보다 장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의 확충이라든지 내용이 달라진 산업정책(예컨대 첨단기술산업이나 지식정보산업의 발전을 위한)을 시행하기 위해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이 지향할 바는 시장으로부터 국가의 철수가 아니라 다른 내용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다.

전경련이 주장하듯 현 시점에서 헌법의 경제조항은 손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방향과 내용은 전경련의 주장과 달라야 한다.

전경련은 경제조항의 철폐나 대폭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헌법에서 개발을 위한 개입을 규정한 조항(국토 및 농어촌개발과 대외무역 육성을 위한 개입)은 수정될 필요가 있지만, 복지와 재분배를 위한 개입을 규정한 조항(분배정의나 독과점 규제를 위한 개입)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을 시장의 독재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장의 독재는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국가의 독재보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훨씬 가혹할 것이다.



주간동아 2001.02.22 272호 (p100~100)

<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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