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2000.11.16

‘안정과 변화’ 이분법으로 세상보기

  • 입력2005-05-30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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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과 변화’ 이분법으로 세상보기
    최근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윤건차 교수(재일동포)가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65명을 성향별로 분석,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이란 책을 펴내 화제가 됐다.

    윤교수의 분류에 따르면 김세균 김수행은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자, 조희연 김동춘은 좌파적 시민사회론자, 재독학자 송두율과 강만길 임지현은 진보적 민족주의자, 최장집 한완상은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지하는 복고적 민족주의자, 조갑제는 극우반동, 신용하는 보수적 민족주의자, 강준만 진중권은 비판적 자유주의자다. 윤교수의 지식인 지도는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좌파, 우파, 진보, 보수라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잡지 ‘이성’(reason)의 편집자인 버지니아 포스트렐은 지금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현상은 좌로도 우로도 해석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한다. 정치는 좌파지만 경제는 우파일 수도 있고, 문화는 보수적이지만 개혁에는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이름표를 달아줄 것인가.

    예를 들어 냉전시대에 소련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을 맹렬히 비난했던 제레미 리프킨이, 소련을 악마로 몰아세우던 팻 뷰캐넌과 시사토론회장에서 사이좋게 한 목소리로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과학과 자본을 맹공격한다. 환경주의자 리프킨이 이민규제운동을 벌이고, 군수산업의 대변자 뷰캐넌은 대기업을 규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포스트렐은 저서 ‘미래와 그 적들’에서 종래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이분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으며, 정체불명의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새로운 잣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대로 ‘안정론자’(stasist)와 ‘변화론자’(dynamist)라는 새로운 분류법으로 보면 좌파 지식인 제레미 리프킨과 공화당의 뷰캐넌이 어떻게 손잡을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안정론자이기 때문에 한 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복고주의자, 테크노크라트, 환경주의자를 안정론자로 묶고 벤처기업인, 예술인, 과학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을 변화론자로 분류한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며 변화론자의 입장에 서있는 저자는 안정론자들이 미래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라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안정을 핵심적 가치로 내세우는 복고주의자는 변화를 후진시켜 실제로 존재했거나 허구로 존재한 과거로 복귀한 다음 그것을 고수하려 하며, 테크노크라트들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편’에 서있는 듯하지만 각종 입법과 규제와 소송을 통해 자신들의 통제하에서만 미래가 존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홍적세로 돌아가자”는 식의 녹색 복고주의자들이 안정론에 가세한다.

    어쨌든 뷰캐넌주의자들의 애국주의는 녹색주의자들의 반상업적 본능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안정론을 낳는다. 그것은 또 보호주의를 추구하는 산업체와 노조 같은 이익집단으로부터 호응을 끌어내며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반면 변화론자들은 ‘해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굳이 계획을 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통제된 미래를 거부한다. 그들은 저절로 생기는 질서의 힘을 믿고, 실험과 피드백을 믿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진화의 힘을 믿고, 중앙에서 군림하는 지식의 한계를 믿고, 현대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독창성과 다양성에서 자극을 얻는다. 그들은 열린사회를 옹호하고 새로운 사유 앞에서 열린사회의 문을 닫으려는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존재다. 기술이민의 문호를 넓히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첨단기업 경영인들, 검열을 두려워하는 예술인, 자녀를 자기 손으로 가르치려는 사람들, 생명공학 연구 금지에 반대하는 과학자들,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수입상들, 극우 논조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 드는 언론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변화론자의 편에 선다. 이 세상은 ‘변화를 거부하는 안정론자와 변화를 지향하는 변화론자의 충돌’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세상을 안정과 변화라는 잣대로만 파악하려는 포스트렐의 이분법은 아직 위태로워 보인다. 또 변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안정론자들을 궁지에 몰아가는 듯한 인상도 준다. 덧붙여 미국을 겨냥해 만들어진 잣대를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포스트렐의 잣대는 혼란스러운 한국의 지식판과 정치판을 분석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다음 질문에 OX를 하면서 스스로를 평가해 보자. 통제되고 공학적으로 설계된 세계를 바라는가? 변화를 지향하는가? 안정성과 조정을 높이 평가하는가, 진화와 학습을 높이 평가하는가? 과학기술에 계속 희망을 갖는가? 진보는 중앙통제에 의해 구현해야 한다고 보는가? 예측된 미래를 중시하는가? 이변을 중시하는가? 당신은 안정론자인가 변화론자인가? 미래와 그 적들/ 버지니아 포스트렐 지음/ 이희재 옮김/ 모색 펴냄/ 376쪽/ 1만1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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