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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탄다 속타” … 현대사태 묘책 없나

정부, 결단 못 내리고 끙끙…현대건설 위기 타계열사·대북사업에 불똥 튈까 걱정

“속탄다 속타” … 현대사태 묘책 없나

“속탄다 속타” … 현대사태 묘책 없나
현대건설이 무려 네번째 자구계획을 내놓은 10월18일 오후 외환은행 13층 대회의실. 김경림 행장의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질문과 답변이 거의 한 시간을 넘기자 한 기자가 “마지막으로…”라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마지막 아닙니다. 여기도 질문 있습니다”라며 말을 가로막았다. 김행장도 답답하다는 듯이 “끝까지 해봅시다”라며 비서진에게 담배와 재떨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김행장은 “여러분에게 검증을 받고 싶다”며 답답한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이렇게 장시간의 입씨름이 계속됐지만 다음날 언론이나 시장의 반응은 역시 탐탁지 않았다. MK(정몽구회장) 진영의 현대자동차측도 현대건설의 추가 자구방안 중 하나로 제시된 800억원대 전환사채를 인수하지 않겠다며 MH(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진영인 현대건설측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이번 자구방안에서 새롭게 추가된 현대아산 지분 매입에도 나서겠다는 계열사가 없는 형편이다.

김행장은 이날 발표에 앞서 ‘현대건설 출자전환설’을 잠재우려는 듯 “출자전환은 채권은행이 검토한 적도 현대건설이 요구한 적도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시장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게다가 현대건설은 시중 금융기관들이 퇴출기업 선정을 위해 구성하게 될 신용평가위원회의 심사도 통과해야 할 판이다.

“출자전환도 뾰족한 수 아니다” 회의적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현대건설 처리 문제가 이미 재무제표상의 부채만 줄이면 해결되는 ‘유동성’ 문제의 선을 넘어섰다는 데에 있다. 한나라당은 이미 “현대가 ‘제2의 대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고, 최근 야당의 경제 전문가들은 “현대건설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공연히 내놓고 있다. 현대건설 문제는 이미 IMF 사태 이후 기업 구조조정의 시계바늘을 진전시키느냐 원점으로 되돌리느냐의 시금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현대 계열사 처리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물론 정부가 출자전환이나 계열 분리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진념 재경부장관은 여전히 ‘4대그룹 계열사의 출자전환은 없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계열 분리 문제도 진장관의 이러한 언급을 언론들이 나서서 유추해석한 측면이 크다. ‘4대그룹 계열사의 출자전환을 허용하지 않겠다면 현대건설을 계열분리한 뒤 출자전환하겠다는 것’이라고 앞질러 해석해버린 것이다. 이는 정부가 실질적으로 현대건설의 계열분리를 압박하기 위해 ‘출자 전환’이라는 카드를 띄운 것 아니냐는 분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다음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설명.

“현대자동차야 MK라는 대주주가 있었기 때문에 계열 분리가 가능했던 것 아닌가. 건설을 계열 분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누구에게 뭘 준다는 이야기인가.”

경제부처의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이 참여해 출자 전환한다면 결국 현대건설을 국유화한다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출자 전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분석들을 종합해볼 때 ‘출자 전환’ 아이디어는 금감원 내 일부 실무진에서 검토된 적은 있으나 현재로서는 압박 카드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0월18일 58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구계획 발표 이후, 부실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벌이는 은행들 사이에서도 ‘현대건설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잡힌 은행들이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현대를 둘러싼 위기의 징후가 현대건설 사태의 원만한 해결로 매듭지어질 수만 있다면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 현대증권 투신 등에 대한 10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가 이미 정부측에 대한 AIG측의 자금지원 요청으로 10월말 본계약 체결을 앞두고 혼미한 국면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란의 핵심에서 현대는 한발짝 비켜서 있다. 양해각서(MOU)가 체결된 이상 본계약 체결 전까지는 AIG측과의 협상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현대증권이나 투신 관계자들도 ‘현대가 AIG를 이용해 정부로부터 특혜를 끌어내려 한다’는 비난을 의식한 듯 “우리는 모른다”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내부에서는 AIG측의 문제제기로 인해 한남투신 인수의 부당성이 부각되는 데 대해서는 반기는 눈치다. 현대증권의 고위임원은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조그만 비용으로 해결할 것인지, 여론이 무서워 나중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해 외자유치 논란을 둘러싼 심중의 일단을 드러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의 금융계열사 내에서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들이 나오면서 미묘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현대증권 관계자는 AIG 외자 유치 과정에서 현대증권의 경영권도 AIG측이 갖는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강하게 부정하면서 그 진원지로 현대투신측을 지목했다. AIG가 현대증권에 투자하는 방식은, 투신과는 달리 1년 후 주식 전환 조건을 단 후순위채권 인수 방식이며 이를 모두 주식으로 전환한 뒤에도 AIG측은 준법감시인을 파견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증권측의 설명. 증권측은 투신과는 명확하게 분리의 선을 긋고 있다.

게다가 10월말 본계약 체결을 앞두고 AIG와 정부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현대증권 관계자는 “경영진이나 노조 모두, 부실덩어리인 현대투신은 떼어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10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가 물 건너가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둔 것으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투신의 부실이 증권에 비해 훨씬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투신사는 일반적으로 고객자산이 있고 인출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순자산이 마이너스 상태에서도 굴러가게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권 등 일부 금융계열사에만 외자를 유치한다는 구상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의 대북사업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지도 정부로서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외국인투자가들을 비롯한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현대의 무모한 대북사업이 그룹 전체의 부실을 심화시켰다는 데에 이미 의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을 의식한 듯 현대는 이번 자구방안 발표에서 현대건설의 현대아산 지분 10%를 매각한다는 방안을 포함시켰으나 이를 누가 사들일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당사자인 현대아산 관계자조차도 “우리는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외환은행의 김경림 행장은 이와 관련해 ‘수익성 없는 대북사업만 벌이는 현대아산의 지분을 과연 누가 사겠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계열사 또는 과거의 관계사들이 사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지난번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능력에 알맞게 대북 투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무리없이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힌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대북사업에 대한 현대의 기득권은 인정하되 투자 규모는 남북협력기금 등 정부 주도로 조성하는 기금 규모 안에서 이뤄지도록 조율하겠다는 구상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대북사업은 남북기본합의서에 언급된 경제공동위원회를 가동시켜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채널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사고 친 현대는 여전히 버티기 인상

그렇다고 정부가 아직까지 대북사업에서 완전히 현대를 버렸다는 징후는 읽히지 않는다. 이른바 ‘이익치 리스트’ 등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에 대한 모종의 대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정부로서는 부담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도 사견임을 전제로 “(대북사업을 하는) 기업 입장에서야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제 와서 정부가 대북사업에 브레이크를 걸겠다면 그동안의 투자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 아닌가”고 말했다. 이미 정부와 현대는 대북사업에 관한 한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현대건설이나 금융 계열사 등의 운명이 모두 현대 문제의 독립변수이자 종속변수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MH측 계열사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LG와의 빅딜 이후 꾸준한 호조를 유지하던 현대전자의 사정은 어떤가. 현대전자는 최근 세계시장에서 D램 가격 하락에 따라 시장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는 형편이다. 3분기만 해도 현대전자는 2조4000억원의 매출에 당기순이익만 660억원을 기록하는 호조를 지속해왔다. 그러나 국제 현물시장에서 64메가 D램 가격이 5달러선 밑으로 떨어지는 등 가격 하락세가 쉽게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자 덩달아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현대전자측에서는 “12월이 전통적인 PC 성수기인 만큼 일단 연말까지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장 분석가들은 반도체 가격 하락이 이미 세계적 공급 과잉현상의 여파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쉽게 진정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부나 채권은행들이 현대건설 문제에 대해 질질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까지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현대건설의 처리 문제가 현대건설 자체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건설 증권 전자 등 MH 계열사들의 부침과 운명이 모두 얽혀 있는 연결 변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MH 계열사 전반의 위기로 번지고 이를 통해 대북사업에까지 타격을 입히는 것만큼은 막아야겠다는 것이 정부측이 현대를 놓고 고민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시장에서 ‘사고’를 친 현대측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시장의 사고를 ‘수습’하는 정부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주간동아 2000.11.02 257호 (p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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