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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어처구니’가 있어야 한다

‘어처구니’가 있어야 한다

‘어처구니’가 있어야 한다
필자 나이쯤 되는 세대라면 1960년대 중반 김기수 선수가 한국 최초로 프로 권투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온 국민이 라디오 앞에 모여 열광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1976년 양정모 선수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을 때에도 우리는 대단히 흥분했다. 모두 다 배고프고 서러웠던 ‘개발도상국’ 시절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 8개나 되는 금메달을 땄지만 그저 심드렁한 분위기다. 스포츠가 아니라도 우리 국민이 세계무대에 나가 정상급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 다른 말로 하면 기대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자존심 하나만은 대단한 민족이었다. 우리의 비교 기준은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나라들이 아니다. 늘 미국이나 영국, 아니면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다. 하나같이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들과 비교한다. 우리가 드디어 ‘노벨상 국가’ 대열에 합류하였지만 반응은 오히려 덤덤하다. 이제껏 노벨상을 타지 못했던 것이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자신감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기가 질리는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가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민족이라고 여긴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해내는 것도 바로 그런 왕성한 에너지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은 주를 덧붙인다. 그런 폭발적인 에너지가 어디를 향할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합리성이 결여된 탓에 앞일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 ‘개도국’ 시절에는 고추장 먹은 힘으로 버티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 축구’를 펴는 일본 앞에서 우리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게 된 그간의 사정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지 않는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자기최면을 걸 때가 아니다. 지금은 1960년대가 아니다.



그날만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반포 근처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저 그런 일이려니 무심히 여기며 보통 때처럼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곳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참혹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을까. 모두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정작 어처구니없는 일은 삼풍의 비극이 우리 기억 속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삼풍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지만, 우리의 건축문화가 그런 참사로부터 어느 정도의 교훈을 얻었는가. 세상은 달라졌는가. 공사 현장의 이야기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우리의 일상을 통해 체감하기로는 모든 것이 ‘전과 동’이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비싼 값을 치러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 것인가.

“아픈 기억도 어찌 그리 쉽게 잊을까. 어처구니가 없다”

일은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경제위기설이 또다시 꼬리를 문다. 12월이니, 3월이니 하며 경제위기가 재현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벌써 설렁탕집부터 분위기가 다르단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어느 선배는 나지막한 소리로 “지난 10여 년 이래 가장 어려운 때인 것 같다”며 고충을 토로한다. 좌중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아 버렸다. 어느 누구도 앞에 놓인 소주잔에 손을 대지 못했다. 3년을 못 넘기고 또다시 ‘IMF 망령’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의 실체인가. 자괴심(自愧心)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처구니’라는 말은 원래 맷돌의 손잡이를 뜻한다. 콩을 갈려고 맷돌을 대령했는데, 정작 손잡이가 없으니 다 무슨 소용이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자존심도 좋고 포부도 중요하지만 기초가 있어야 한다. 분수도 모른 채 자꾸 ‘가까운 일본’만 찾으니 헛바람이 드는 것 아닌가. 거품을 빼야 한다. 진정한 자존심,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그것은 철저한 자기 성찰에서 나온다. 우리 민족이 어처구니를 찾아 들 날이 과연 언제일까.



주간동아 2000.10.26 256호 (p10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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